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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자 종착지 (2022년 겨울)

1991년생 태희 씨는 영화감독이자 PD다. 임신 중지 경험을 다룬 사적 다큐멘터리 <물 이야기>를 연출했다. 인간 근원의 종교성을 깊이 탐구하는 영화를 만들고자, 미디어아트와 다큐멘터리 그리고 극 영화의 경계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태희 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의정부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신앙이 깊고 교육열이 높은 가정에서 자라며 태희 씨는 어린 시절부터 강도 높은 입시 교육을 경험했다.
저는 1991년생이고, 서울에서 태어났어요. 서울과 의정부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도시의 환경적 차이랄까 그런 부분을 어렸을 때부터 섬세하게 느꼈어요. 90년대만 해도 의정부에는 미군이 되게 많았어요. 평범한 도시의 분위기가 아니라고 느꼈던 것 같아요. 제가 초등학교 때 미군 장갑차 사건도 있었고, 그런 사건이 제게는 굉장히 강한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사실 어떤 면에서 의정부는 지금도 많이 달라진 건 없어요. 요즘도 의정부를 자주 가는데 그만큼 그 동네가 가진 특수성이 있거든요. 저에게는 의정부라는 지역이 가지는 독특한 면이 제 어린 시절이나 종교성을 깊이 고민하는 지금의 제 삶에 영향을 줬다고 느껴요.
아버지는 60년생이시고, 어머니는 65년생이세요. 아버지는 서울 출신이고, 어머니는 마산 출신이시고요. 두 분은 대학생 때 캠퍼스 커플로 만나 결혼하셨어요. 친가가 구교집안이라, 부모님도 성당에서 결혼하셨어요. 저는 당연히 모태신앙이고, 제 삶은 계속 어떤 식으로든 성당과 연결되어 있었어요. 형제는 남동생이 한 명 있고, 95년생이에요. 나이 차가 좀 나다 보니 교류가 많지 않았고, 남동생은 어릴 때 조기 유학을 갔어요.
우리 가족은 아주 부유한 편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할아버지가 부유한 편이었고, 아버지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평범한 편이었어요. 그런데 경제적으로 할아버지만큼 성취하지 못했던 점이 아버지에게는 저에 대한 높은 기대로 작동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의 교육열이 무척 높아서 저는 초등학생 때부터 외고 진학을 준비했어요. 초등학생이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공부하다 돌아오고 했는데, 돌아보면 90년대 초반생이었던 저희 세대가 전반적으로 교육열, 사교육 열풍 이런 게 굉장히 강한 시절에 자랐던 것 같아요. 저는 유년기, 청소년기를 떠올리면 매일 학원 다니고, 공부하다 힘들어서 울고, 성적이 좋지 않아서 낙담하고 그런 기억이 많이 나요.
어린 태희 씨를 사로잡았던 것은 공부보다는 음악과 미술, 영화 같은 예술의 세계였다. 태희 씨를 향한 부모님의 높은 기대와 실망, 일찍이 겪은 입시 실패와 주변과의 갈등은 태희 씨의 청소년기를 암흑의 시간으로 남게 했다.
저는 예술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어릴 때부터 미술을 했고, 플루트랑 태평소를 오래 배웠어요. 청소년 오케스트라 단원이기도 했고요. 주변에 같이 악기를 했던 친구들은 예중, 예고에도 많이 진학했어요. 주변에서 부모님께 예중에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기도 했고, 저도 그런 마음이 있었지만, 부모님이 계속 반대하셔서 지원도 못 했어요. 그렇게 예술을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부모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외고 입시를 선택했죠. 그런데 외고 진학은 결국 실패했어요. 그리고 입시에 실패한 여파는 고등학교 내내 이어졌어요.
그때는 입시에도 실패하고, 부모님이 기대하던 것만큼 성적이 안 나오니까 부모님과의 갈등으로 저도 많이 힘들어했던 시기예요. 그 당시의 저는 이런 어려움의 무게를 견뎌낼 힘이 없었던 것 같아요. 사실 그 무렵부터 20대 중반까지는 냉담을 했어요. 계기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데, 사소한 이유로 처음에는 하루 이틀 빠지던 것이 긴 냉담으로 이어졌고, 외고 입시에 실패하면서는 종교적인 부분에 의지하던 것도 멈췄어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긴 냉담 동안 성호 긋기는 거의 매일 하고 다녔어요. 무의식적으로 신앙을 온전히 놓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제 청소년기는 정말 암흑의 시기였고, 온전히 살아 있었다고 보기가 어려운 시절이었어요. 그래서인지 전혀 기억이 안 나요. 아무 기억도 안 나고, 그때 경험한 단절의 감각만 기억나요. 실패의 상처, 관계에서 경험한 갈등과 불화, 자아가 형성되기도 전에 시작된 냉담, 스트레스와 불안 그런 것들이 모두 겹쳐서 무엇에도 의지하지 못하고, 아무도 사랑하지도, 누구로부터 사랑받지도 못한 시기였어요. 그러다 부모님이 제가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미술을 다시 시작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고, 동양화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어요.
외로움과 괴로움 속에 헤매던 청소년기의 태희 씨를 위로했던 친구는 영화와 드라마였다. 미대에 진학했지만, 일찍이 태희 씨는 동양화 작가보다는 방송국 PD가 되겠다는 목표를 갖고 치열하게 대학 생활을 채워 나갔다.
유일하게 제가 몰두하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했던 일이 영상을 보는 것이었어요.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데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방송국 PD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언론고시 준비를 열심히 했어요. 2년 넘게 방송사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고, 방송국 인턴,대외활동 등으로 다방면의 활동을 했어요. 같이 방송국을 목표하는 친구들하고 스터디도 열심히 했고요.
또 한편으로는 전공이었던 동양화 작업도 되게 열심히 했어요. 20대 초반에 저는 거의 학교 작업실에서 살았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방송국 준비하는 친구들이 다 그런 느낌으로 살아서 내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생각도 없었어요. 다만 조금 괴로웠던 건 너무 스펙을 쌓으려고 노력하고 애쓰다 보니 지치기도 했습니다. 대학 시절에도 저는 냉담 중이었는데 그래서였는지 열심히 살면서도 기댈 곳이 없고, 단절되어 있다는 마음의 공허함이 되게 컸어요. 그런 게 너무 괴로웠어요. 사랑 없는 삶을 사는 것 같은.
스물넷, 태희 씨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결혼을 약속했다. 하지만 삶은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태희 씨는 중요한 생의 사건을 겪는다.
대학교 마지막 학년을 인턴십으로 해외에서 보냈어요. 그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도 만났지만, 인생은 제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이별을 경험하고 큰 아픔과 행복을 경험하게 되면서 스물넷은 저에게 큰 변화를 안겨 준 회심의 시간이 되었어요. 당시의 아픔은 제 인생에서 가장 큰 감정이었고 앞으로도 인생을 살면서 그때보다 더 큰 감정은 없을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청소년기부터 느껴온 단절감, 외로움 그리고 이 시기의 괴로움이 다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다시 대학으로 복학한 태희 씨는 누구에게도 자신이 겪은 아픔을 나누지 못한 채 졸업을 준비한다. 많이 지쳐있던 태희 씨는 한국을 떠나 승무원으로 일하며, 냉담을 풀고 다시 신앙 안으로 돌아오는 체험을 했다.
그 시기에 저는 정말 너무 쉬고 싶었어요. 대학 시절을 정말 치열하게 보내기도 했고, 마지막 학기를 앞둔 상황에서 인턴십을 갔었거든요.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뒤 바로 졸업 전시를 위해 학교에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제가 경험한 삶의 감정들을 당시에는 누군가와 공유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아픔도 기쁨도 온전히 혼자서 감내했어요. 그래서 그 시기가 굉장히 괴롭고 외로운 시기였고, 이곳을 떠나서 쉬고 싶다는 생각으로 외국에 나가서 지내다 올 길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때 누군가 항공사에 취업하는 길을 추천해줬고, 외국에 나가 일하면서 1~2년 정도 보내고 돌아와서 다시 방송국 취업을 준비하겠다는 얄팍한 마음으로 승무원 시험을 봤어요. 그런데 이때 시험을 보러 말레이시아에 갔다가 냉담을 풀게 돼요. 시험을 보러 가긴 했는데, 너무 마음이 힘들고 지치고 이런 것들이 밀려오면서 생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그래서 괜히 일부러 위험하게 도로를 걷기도 하며 정처 없이 떠돌다가 발길이 멈춘 곳이 성당 앞이었어요.
마침 성당 문이 열려 있었고, 우연히 들어간 그 성당에서 다시 신앙 안으로 돌아오는 체험을 했어요. 지금도 저는 냉담을 푼 것은, 제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다시 성당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거든요. 내가 어떤 의지를 갖고 노력한 것이 아님에도 다시 성당 앞에 서게 되고 그곳에서 신비 체험을 하면서 다시 성당에 다니게 되었어요. 그리고 시험에 합격하면서 승무원 생활을 시작했어요. 막상 일하면서는 얄팍했던 마음과는 다르게 승객들의 안전에 대한 책임감으로 매일 공부하고, 사명감으로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제게는 직업인으로서 사명감과 그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배우는 기회였어요.
승무원으로 일하며 태희 씨는 쉽게 갈 수 없는 지역의 성당을 두루 순례하며 점차 성숙해지는 신앙을 체험한다. 그러나 지난 삶의 모든 흔적과 감정은 여전히 태희 씨 홀로 감내할 몫이라고 느꼈다.
비행을 가면 보통 하루나 이틀을 관광하면서 보내요. 당시의 저는 주변에 의지하며 아픔이나 삶의 흔적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더 절실하게 의지할 곳이 필요했고, 비행을 가면 무조건 성당을 갔어요. 저는 외국 항공에서 근무했는데 그 항공사가 아프리카도 많이 가고 개인적으로는 방문하기 어려운 국가도 많이 다녀요. 그래서 저는 나이지리아나 우간다, 탄자니아, 케냐 이런 낯선 곳에 있는 성당을 찾으면서 제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이어갔어요. 비행할 때마다 무조건 성당을 갔으니까, 목적지에 있는 성당은 다 가봤어요. 어떻게 보면 성지 순례처럼 세계 곳곳의 많은 성당을 순례한 거죠.
다양한 사람들이 그들이 속한 문화와 자연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 개인의 신앙은 성숙해진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공동체에 뿌리를 내리고 신앙생활을 하기에는 좀 어려웠죠. 또 한편으로는 냉담을 풀었지만, 냉담을 하던 시기의 저의 삶에 대한 고해성사를 보기가 힘들었어요. 주님이 없는 지난 시간을 입 밖으로 꺼내 돌아보는 것에 두려움과 망설임을 느꼈습니다.
그 무렵에 한국 본당에서 임신 중지 반대 서명을 받던 기억이 나요. 저는 서명을 할 수 없어 망설였어요. 미사가 끝나고 난 뒤에도 저를 쫓아오며 서명을 받기 위해 노력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정말 오랜 시간 떠나있던 한국의 본당은 냉담을 풀게 했던 외국의 본당과는 매우 다른 분위기와 모습이었어요. 따뜻한 환대의 느낌보다는 빨리 이 본당에서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중압감과 책임감이 더 크게 느껴졌어요. 그래서인지 한국 본당에서 고해성사를 보고 마음을 터놓기까지에는 꽤 오랜 시간과 결심이 필요했습니다.
영상 작업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던 태희 씨는 짧은 승무원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돌아온다. 그리고 방송사 편성 PD 생활과 여러 과정을 거쳐 영화감독으로서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한국에 돌아오고 작은 방송국에 입사해서 편성 PD 생활을 1년 정도 했어요. 그러다 학업을 위해 그만뒀어요. 그때까지는 저도 방송국 PD로 어느 정도 경력을 쌓고, 그 후에 내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그런데 사실 영화는 평생을 바쳐야 하는 예술의 한 장르인데, 현실적인 고려를 하다 보니 정작 정말 해야 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어요. 한편으로는 대학 시절부터 이어지던 더 나은 커리어, 더 높은 스펙에 대한 압박감이 끝이 없기도 했어요. 저는 케이블 방송을 다녔기 때문에 공중파로 이직하기 위해서 퇴근하면 매일 학원에 다녔어요. 12시, 1시 넘어서 집에 들어가고 아침에 또 출근하고 그런 생활이 되게 지치고 힘들었죠.
그런데 정작 제가 기억하는 인생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할아버지 댁에서 세계 미술사 백과사전을 보던 때예요. 저는 내성적인 아이여서 매일 혼자 그 책을 읽곤 했는데, 하루는 피카소의 게르니카 그림을 보고 울었던 적이 있어요. 그 그림이 너무 좋아서 울었던 거죠. 그 책에는 자신의 평생을 바쳐서 작품을 완성하는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때 저는 나도 이렇게 살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생각은 그 뒤로도 한 번도 바뀌지 않았어요. 그런데 막상 먹고 살아야 하고,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고, 부모님이 자랑할 만한 존재가 되고 싶고 그런 마음 때문에 좋은 직업으로서 방송국 PD가 되고자 했던 마음도 솔직히 조금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저를 속이면서 살았던 거죠. 진정한 자신을 들여다보면 저는 언제인지 모를 때부터 예술을 좋아했고, 그 안에서 가장 솔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마주하게 되었어요.
예술가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태희 씨는 예술과 신앙이 자신에게는 같은 의미로 여겨진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부터 사랑했던 많은 예술가들처럼 이제 태희 씨는 자기 삶 안에서 길어 올린 성찰을 영상을 통해 표현하는 작업을 한다.
지금은 영상 연출가이자 영화 PD로 살고 있어요. 어딘가에서 봤는데 ‘타르코프스키는 영화를 성당으로 만들고, 아핏차퐁은 영화를 법당으로 만든다.’ 저는 그 문구가 인상 깊었어요. 그게 제가 추구하는 방향과도 닮아있는 것 같아요. 예술이라는 게 결국 자기 영혼을 들여다보고 그 과정을 통해서 소통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신앙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제가 이해하는 신앙은 자기 안에 있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 지점들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는 사랑의 과정인데 그런 면에서 예술과 신앙은 너무 닮아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어느 순간부터는 제 삶 안에서 예술과 신앙을 서로 분리하지 않고 일치시켜서 계속 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작품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은 결과적으로는 제가 신앙 안에서 성찰하고 배우는 지점들이에요.
종교를 가진 여러 예술가의 생애를 보면, 공통적으로 자신들의 삶에서 겪은 생애사적 사건을 자신의 종교와 연결해 작업으로 표현해나가는 과정들이 있어요. 그 과정은 결국은 종교 안에서 자신의 모든 것, 상처, 기쁨, 슬픔, 희로애락의 감정을 승화하는 길이고, 또한 자신의 인생과 신앙이 결합한 결과물을 작품으로 나타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제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그런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작품을 통해서 제 삶의 이유, 제가 종교에서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 그런 지점을 파고들고 있어요. 예술과 신앙은 저한테는 어떻게 보면 같은 의미처럼 느껴져요. 제 인생의 목적이고, 제 인생의 종착지.
공동체에 온전히 뿌리내리지 못한 신앙이 아쉬움으로 남았던 태희 씨는 본당 활동에 참여하며 열심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성당은 답답함도 상처도 주었지만, 태희 씨는 지난 시간과의 화해 역시 교회 안에서 비로소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저는 혼자서 기도하고 신과 소통하고 이런 게 진정한 천주교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을 잡고 본당에서 주말마다 활동을 계속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사실 결국 저는 성당 안에서 얻은 것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사람도 얻지 못했고, 열심히 기도했던 일이 이루어진 적도 별로 없어요. 그런데 이제는 신앙이 소원을 들어주거나, 뭔가를 얻게 하지는 않지만, 저를 강하게 만들었고 사랑이라는 걸 알게 했다고 생각해요. 그 사랑은 내가 무언가를 받지 않아도 줄 수 있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항상 주님께 돌아가는 그런 작동 원리를 가진 사랑이었어요. 지금의 제가 가진 짧은 식견에서는 신이 존재하는가, 천주교가 좋은가 그런 걸 떠나서 내가 사랑 안에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게 바로 신앙이기 때문에 저는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주님이 아닌 교회에는 크게 기대하지 않아요. 정확히는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 것 같아요. 무엇도 기대하지 않을 때 신앙의 또 다른 국면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저도 아무래도 ‘나라는 사람은 가톨릭교회가 권하지 않는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자꾸 왜곡된 소외감이 들었어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왜곡 속에서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깊게 생각할 수 있었어요. 성당 다니는 주변 청년들이랑 얘기하면 서로 생각이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느껴요. 가톨릭교회 안에서 사회적으로 ‘여성의 이슈’로 분류되는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꺼내어 놓기 어려운 부분이 있고. 자신의 고민이나 생각들을 공유하려고 해도 막상 성당 안에서 깊게 얘기 나눌 사람이 없고, 본당 일하면서는 관계에서 상처받고, 기뻐하고 이런 거는 많이 유사하더라고요.
기본적으로 저는 성당에서 신앙 생활하면서 스스로가 고민해야 하는 지점이 많아요. 내적 갈등이 많죠. 하지만 이 큰 테두리 안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본질은 무엇인지 생각하려고 해요. 짧은 시간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게 쉽지 않고, 또 그 변화를 위해서는 우리도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름대로 시도하면서 교회를 떠나지 말고 같이 나아가자고 얘기하고 싶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의미를 갖는 지점에서도 저는 마냥 교회에서 파생된 상처를 품었다고는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저는 성소가 있기도 했었어요. 그래서 한 수녀원에서 제 생애를 다 나누면서 성소 식별 과정을 가졌어요. 그런데 제 냉담 시기의 삶을 고백하고 돌아봤을 때 들었던 얘기가 “괜찮다”는 것이었어요. 가톨릭교회의 보수성에 대해 많이 얘기하지만, 그때 비단 제 아픔만이 아니라 인간이 삶에서 겪을 수 있는 아픔에 대해 들어주고 공감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느꼈어요. 그때 교회 안에서 품었던 상처가 해소되는 체험을 했어요. 또 한 피정에서 제가 가진 신앙과 제가 떠나보내야 했던 지난 시간 사이에서 화해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돌아보면 제가 경험한 화해와 치유는 모두 교회 안에서 이루어졌어요. 최근에 가톨릭 여성의 임신 중지 경험에 대한 좌담회에 참석했는데, 이런 중요한 생애사적 사건을 경험한 가톨릭 여성은 한편으로는 교회에서 상처받으면서 동시에 신앙이 굉장히 깊어지는 체험을 하기도 한다고 하더라구요. 그 말에 정말 공감했어요.
앞으로 인간 근원에 맞닿은 신앙과 삶에 대한 물음을 탐구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태희 씨는 지금도 인간과 종교에 관한 작업을 하고 있다.
지금도 저는 인간이라는 개념이 거대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에 관한 영상 작업을 계속하고 있어요. 제가 처음 작업한 다큐멘터리 기획안이 임신 중지에 대해 신앙 안에서 탐구하는 작업이었는데 반응이 부정적이었어요. 그래서 한 번 엎었다가 결국 다시 시작했는데, 신앙 얘기는 좀 비유적으로 풀기는 했지만 결국은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게 되더라고요. 본질적인 정체성이라는 것은 잘 가려지지 않는 것 같아요.
또 지금은 수도자들의 삶을 바라보고 일상을 성찰하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어요. 수도자는 세상의 촛불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데 저희는 그 빛을 보기 어려운 시대를 사는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어디에 그 빛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미디어 작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 빛을 양지로 끌어 올려서 더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하고 있어요.
저는 앞으로도 종교를 더 잘 알기 위해서 신학이나 철학을 공부하고 그런 사유를 바탕으로 영상 작업을 하고 싶다는 계획이 있어요. 인간의 삶과 종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로베르 브레송의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처럼 소박하지만, 인생을 관통하는 정서를 담은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아주 큰 꿈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