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호 경향신문 기고
긴장과 불화
꽤 오랫동안 ‘창조적 긴장(creative tension)’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었다. 때로는 긴장도 필요하다는 의미로 이해해왔는데 이는 지나치게 ‘긴장’에 초점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창조적 긴장은 긴장을 통해 비로소 더 풍부하고 창의적인 과정과 결과가 가능해진다는 의미가 있다. ‘긴장’ 그 자체가 아닌 ‘창조’가 창조적 긴장의 핵심인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불화에서 시작된다는 말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도 초점은 불화가 아닌 평화에 있다. 불화는 평화를 향하는 과정이다. 불화를 피하고자 모두가 침묵하며, 아무도 목소리 내지 않는 상황은 결코 평화가 아니다. 오직 불화함으로써 참 평화는 가능해진다. 일단 싸우고 보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평화의 시대로 여겨진 시대에 참 평화가 있었던가 곱씹어보면 답은 분명하다.
로마의 평화, ‘팍스 로마나’는 과연 모두를 위한 평화였을까? 위대한 힘에, 거대한 권력에 의해 가능한 평화는 억눌리고 목소리 없는 수많은 이들의 고통과 억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평화는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 같을 수 없다. 그것은 항상 가장 낮아짐으로써, 고통받는 이의 입장에 함께 섬으로써, 세상의 가치를 전복함으로써 그렇게 불화함으로써 가능한 평화, ‘팍스 크리스티’, 곧 그리스도의 평화다.
불화하는 존재
21세기에 세상의 가치를 전복하고, 불화하고자 하는 존재는 누구인가 생각해보면 흥미롭다. 아웃도어 의류를 판매하는 기업 ‘파타고니아’는 예민한 주제에 관해서는 몸을 사리는 게 상책이라는 통념을 깨트렸다. 파타고니아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도 언제나 과감하고 급진적으로 발언하고 행동한다. 지속 가능한 지구를 위해 “자신들의 옷을 사지 말라”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한다.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는 미식축구 선수 콜린 캐퍼닉을 모델로 발탁했다. 캐퍼닉은 미국 사회 안의 구조적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의미로 경기 전 미국 국가가 흘러나올 때 가슴에 손을 얹는 대신 무릎을 꿇는 행위를 처음 시작해 저항의 상징이 된 인물이다. 이 캠페인의 카피는 “신념을 가져라. 그것이 모든 것을 희생한다는 의미일지라도(Believe in something. Even if it means sacrificing everything)”였다. 나이키의 광고는 논쟁적이었고 인종차별의 현실을 마주하고자 하지 않는 이들의 역린을 건드렸다.
이런 사례는 수없이 많다. 레고는 더는 그저 플라스틱 장난감을 판매하는 기업이 아니다. 레고는 성별과 세대를 초월한 상상력의 공간을 창조하고자 지향하는 한편 지속 가능한 지구를 위해 사탕수수 원료의 식물성 플라스틱 소재로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는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의 태도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 수십 년 동안 일관적인 메시지를 던지며, 의견이나 입장, 캠페인을 통해 돈을 벌려 하지 않음을 증명해온 기업들이 있다.
함께 꾸는 꿈
지속 가능한 지구, 더 평등한 세상, 모든 인간의 존엄. 이와 같은 가치를 말하고 상징하는 존재가 오늘날에는 기업이라는 사실은 더는 교회가 더 나은 세상을 보게 하고 이를 이끌어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씁쓸한 사실을 일깨운다. 더불어 그리스도교는 태생부터 기존의 질서와 불화했음을 상기할 때 오늘날 교회는 충분히 지금 여기의 현실과 불화하는지 물어온다. 2022년의 그리스도인은 누구를 편안하게 하고, 누구를 불편하게 하고 있는가?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더 나아가 불화를 피하고자 우리는 자주 눈을 가리고, 귀를 닫고, 입을 다무는 태도를 내면화한다. 그러나 이윤 추구를 위해 만들어진 기업이 돈을 벌 수 없더라도, 심지어 때로는 고객을 잃고 비난에 직면하더라도, 말해야 한다고 믿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역설은 다시 질문을 던져온다. 믿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더 나은 가치를 전하기 위해 나이키가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면 왜 교회는 또한 그리스인으로서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는가?
세상이 할 수 없는 또는 하지 않으려는 이야기를 하고, 자신의 목숨마저 내어놓을 정도로 큰 위험을 감수하며, 연약하고 부족해서 가치 없다고 여겨지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 이를 통해 기존의 질서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우정을 나누고 더 넓은 연대를 꿈꾸는 것. 이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보이신 모범이다.
이미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향하며 그리스도인은 위험을, 긴장을, 불화를 회피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인류가 구원받았듯, 위험을 감수할 때만이, 긴장을 살아낼 때만이, 불화를 마주할 때만이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