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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과 저항 사이, 종교와 여성의 의복

2021년 겨울호 가톨릭평론 기고
태초의 옷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창세기 3:7)”
여자가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운 나무 열매를 하나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자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게 된다.
창세기에는 태초의 옷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창세기 2장에서 남자와 여자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지만(창세기 2:25)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은 그들은 이제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게 되어 부끄러움을 느끼고 무화과 잎으로 ‘두렁이’를 만들어 몸을 가린다. 그러나 두렁이 옷을 입고도 죄를 지어 두려운 그들은 하느님 앞에 서지 못한다.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주시고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치셨다.
성경에서 ‘옷’은 이처럼 죄를 짓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인간이 자신의 몸을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 처음 등장한다. ‘몸을 싸서 가리거나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 입는 물건’이라는 ‘옷’의 사전적 의미에 아담과 하와가 지어 입었던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만든 ‘두렁이’는 완벽하게 부합한다. 태초의 옷은 죄지은 자의 수치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여성의 옷차림과 교회
구약에 등장하는 태초의 옷 이야기를 지나 신약에는 복장에 관한 성경 구절이 몇 차례 등장한다. 여자들은 얌전하고 정숙하고 단정한 옷차림으로 단장할 것을 강조하는 티모테오전서 말씀이나, 금붙이를 달거나 좋은 옷을 차려입거나 하는 겉치장을 하기보다 내면을 가꾸라는 베드로전서 말씀이 그 예다.
겉치장을 하기보다 마음속에 감추어진 자신을 치장하는 것이 하느님 앞에 귀중하다는 말씀에는 어떠한 틀림도 없을 것이나, 위에 언급된 성경 구절이나 성당에서 권하는 미사 참례 옷차림 예절이 유독 여성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석연치 않은 마음도 불쑥 고개를 내민다. 노출을 지양하고 단정한 옷차림으로 미사에 참례해야 하는 이유를 기도하러 온 남성에게 분심이 들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들어온 경험도 이 꺼림칙한 마음에 일조한다.
“어떠한 여자든지 머리를 가리지 않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면 자기의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자는 머리가 깎인 여자와 똑같습니다.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으려면 아예 머리를 밀어 버리십시오. 머리를 밀거나 깎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운 일이라면 머리를 가리십시오.”(1코린 11:5-6)라 이른 구절을 근거로 미사에 참례할 때 오직 여성만이 미사보를 쓰는 전통 또한 여전히 살아있다.
특별히 여성의 단정한 옷차림을 강조하는 문화가 비단 가톨릭에만 있는 것은 아닌지 지난달 개신교 매체 「뉴스앤조이」에 기고된 칼럼의 제목은 “왜 교회는 '여성의 옷차림'만 갖고 난리인가”이다. 칼럼은 일부 개신교 언론에서 ‘교회 다니는 여성들의 5가지 옷차림 원칙’, ‘크리스천 여성의 옷차림에 대한 4가지 말씀’ 등의 제목을 단 기사가 수차례 발행돼 논란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며 시작한다.
덕분에 호기심을 갖고 찾아본 ‘교회 다니는 여성들의 5가지 옷차림 원칙’의 내용은 낯설지 않다. 5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크리스천 여성은 단정하게 옷 입어야 한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 △여성은 항상 자기 성별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 △자신의 옷차림에 대한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능력과 존귀로 옷 입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칼럼은 이 원칙이 “맥락을 무시한 채 문자적으로 가져와 그것을 여성만이 반드시 따라야 할 성경적 진리인 양 해석하는 것은 매우 무지하고 위험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더불어 무려 21세기에 이런 여성차별적 기사가 반복되는 이유를 “사회적으로 여성 권리가 향상되고 젊은 여성들 사이에 페미니즘이 널리 퍼지면서 교회 내에서도 여성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이라 분석한다. 여전히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교회가 “‘성경’을 명분 삼아, 옷차림을 통해서라도 여성을 통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존재마저 지우는 옷
그런데 경전을 근거로 여성의 복장을 통제하고, 얌전하고 정숙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요구하는 태도에서 탈레반이 다시 점령한 아프가니스탄 상황을 떠올리지 않기는 힘들다. 지난 8월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을 재장악하며 “여성 인권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아무도 그 약속을 믿지 않았다. 실제로 겨우 며칠 만에 전신을 가리는 부르카를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길을 가던 여성이 총에 맞아 숨졌다는 보도가 나왔다.
탈레반은 1996년에서 2001년에 이르는 과거 집권기 동안 여성들의 교육받을 권리와 일할 기회를 박탈했고, 외출 시 부르카 착용을 의무화했다. 그리고 2021년 8월 미국의 철수와 함께 재집권한 탈레반은 부르카가 아닌, 머리카락만 가리는 히잡을 쓰면 학업과 일자리에 접근할 수 있고, 혼자서 집 밖에 나서는 것도 허용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여성들이 전신을 가리는 부르카를 입을 필요는 없을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실제로 지난 8월 17일 자비훌라 무자히드 탈레반 대변인은 기자회견을 통해 “이슬람 율법이 보장하는 범위에서 여성 인권을 최대한 존중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이런 발표가 나온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아프가니스탄 북동부 카타르 지방에서 한 젊은 여성이 총에 맞아 피범벅이 된 채 길바닥에 숨져 있는 사진이 온라인에 공개됐다. 미국 폭스뉴스는 숨진 여성이 부르카를 입지 않고 외출했다는 이유로 탈레반이 현장에서 사살했다고 보도했다.
부르카를 입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은 빠르게 확산되었고, 탈레반 치하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부르카를 장만해야 한다는 공포에 부르카 가격은 10배까지 폭등했다. 미군이 점령한 지난 20년간 부르카 착용 의무는 사라졌기에 많은 아프간 여성들이 길에서 죽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다시 부르카를 구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
아프간 여성들이 느낄 극도의 불안감과 공포는 예멘의 작가 보시라 알무타와켈이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공개한 사진 작품에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연작으로 구성된 작품에는 어느 모녀가 등장한다. 첫 사진에서 머리카락과 목만 가리는 ‘히잡’을 쓰고 있는 엄마와 인형을 품에 안은 어린 딸은 웃고 있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다음 사진으로 시선을 옮길 때마다 모녀의 신체 마디마디는 점차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미소 또한 사라진다. 조금씩 스카프로 머리카락을 더 많이 가리게 되고, 곧 얼굴을 제외한 전신을 가리는 ‘차도르’ 차림이 된다. 모녀는 이내 눈만 남게 된 ‘니캅’을 입고, 종국에는 눈마저 망사로 가린 ‘부르카’ 차림이 된다. 그리고 연작의 마지막 사진에 모녀는 없다. 엄마와 딸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온통 검정뿐이다.
해방과 저항 사이
탈레반이 아프간 여성들에게 온몸을 검은 천으로 가리는 부르카 착용을 강요하는 것이 폭력이자 억압이며, 근본주의적 종교집단이 여성들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사실 종교와 여성의 복장을 둘러싼 여러 논쟁의 맥락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터키 사회의 오랜 화두인 세속주의와 보수 이슬람주의의 충돌을 그린 오르한 파묵의 소설 「눈」에는 ‘히잡’을 두고 논쟁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와 세속주의자의 대화가 나온다. 히잡 착용을 옹호하는 이는 이렇게 말한다.
“히잡은 여성을 불편, 겁탈, 모욕으로부터 보호하고, 사회 속에 더 편히 나갈 수 있게 만들어. 과거에 밸리 댄서였던 멜라핫 샨드라를 포함해 나중에 히잡을 쓰게 된 많은 여성이 밝혔듯이, 히잡은 여성들이 길거리에서 남자들의 동물적인 감정에 호소하는가 하면,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다른 여성들과 경쟁하고 이 때문에 화장을 해대야 하는 가련한 존재에서 벗어나게 했지.”
히잡이 여성을 보호하고, 여성에게 이익이 되며 오히려 여성에게 자유를 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논쟁에서 세속주의 입장에 선 대학교수는 히잡을 쓰지 않을 권리를 강조한다. 히잡이 여성을 억압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에게도 딸에게도 히잡 착용을 간섭하지 않으며 “여성이 히잡을 벗는다면, 사회에서 살아가기가 더 편하고, 더 존경받는 위치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파묵의 소설 속 터키의 상황은 ‘히잡’을 둘러싼 전통적인 논쟁의 양상을 드러낸다. 보수주의자는 히잡이 여성을 보호한다고 믿고, 세속주의자는 여성들이 히잡을 벗게 하는 일이 여성을 해방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정치와 종교의 엄격한 분리 원칙을 이유로 모든 종교적 행위를 공적인 자리에서 금지한 프랑스에서 이 논쟁은 더 다양하고 복잡한 맥락을 지닌다. 이슬람이 소수인 곳에서 히잡 착용은 오히려 사회적 압력에 저항하는 행위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1905년 가톨릭과의 갈등을 계기로 정치와 종교의 엄격한 분리를 천명하는 세속주의 원칙, ‘라이시테’(laïcité)를 확립했다. ‘라이시테’는 상당히 강경한 편으로 이 원칙에 근거해 십자가를 공공장소에서 전시하는 것이 금지되고, 관청에 설치한 크리스마스 구유 장식이 불법으로 판정받은 사례도 있다. 2011년에는 1946년부터 65년간 방송된 기독교 라디오 설교가 금지되기도 했다.
학교에서 종교적 상징을 금지하는 법은 1937년 일찍이 제정되었고, 이 법과 원칙에 근거해 프랑스에서는 2004년 유대인의 키파와 무슬림의 히잡 착용이 공립학교에서 금지되었다. 2011년에는 공공장소에서 눈만 남기고 모든 부위를 가리는 ‘니캅’ 착용 또한 금지됐다.
히잡 착용을 둘러싼 논쟁이 복잡한 이유는 단순히 프랑스가 지켜온 정교분리의 원칙 때문만은 아니다. ‘여성의 평등과 인권’이라는 가치는 논쟁에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다. 프랑스인의 관점에서 종교적 이유로 여성의 몸을 가리도록 하는 의상은 여성의 권리를 억압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르카, 니캅, 히잡 등을 금지하는 일은 이슬람의 남성중심주의로부터 여성을 보호하는 일의 연장선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프랑스의 무슬림 이민자들이 느끼는 히잡 착용의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북아프리카의 옛 프랑스 식민지에서 이주한 이민자 대다수는 무슬림으로 1세대는 프랑스 사회가 요구하는 세속주의에 거부감이 덜했으나 자녀 세대인 2세대, 3세대는 프랑스 사회에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체험 속에 도리어 종교적으로 근본주의화된다. 변두리 지역에서 사회, 문화, 경제적으로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히잡 착용은 오히려 무슬림으로서 정체성을 확인하고, 자신들이 겪는 분노와 소외를 드러내는 일이 된 것이다.
이런 논쟁에 다시 불을 지핀 것은 2016년 프랑스의 몇몇 도시가 전신을 덮는 형태의 수영복 부르키니를 금지하면서다. 특히 프랑스 경찰이 한 여성의 전신 수영복을 강제로 벗기는 사진이 온라인에 공유되며 논란이 커졌다. 더불어 정교분리의 원칙, ‘라이시테’는 종교인의 경우를 예외로 두는데 수녀님들이 해변에서 수도복을 입은 채로 놀 수 있다면, 왜 무슬림 여성들은 부르키니를 입고 수영할 수 없는지 차별 논란이 일기도 했다.
종교로 가장한 폭력에 저항하는 옷들
사미라 하미디 국제앰네스티 인권활동가는 지난 9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탈레반은 종교를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인간이 만든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고 있다”고 말했다. 샤리아(이슬람 율법)를 근거로 여성의 교육권과 노동권을 제한하고, 반대 세력에 잔인한 보복을 일삼는 등 탈레반한테 종교는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일 뿐이라는 얘기다.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생생하게 전하는 목소리를 듣고 읽다 보면, 여러 차원에서 종교와 전통의 이름으로 작동하는 다양한 억압의 구조를 상기하게 된다. 종교에 기대 기득권을 강화하고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미라 하미디 활동가의 말은 우리에게 낯선 통찰이 아니다. 예수님 또한 인간이 만든 이데올로기와 규칙으로 오히려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저버리는 행위를 통렬히 비판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조상들의 전통을 어기냐는 제자들의 비난 서린 질문에 “너희는 또 어째서 너희의 전통 때문에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느냐?”(마태 15:3)고 되물으셨고,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마르 7:13)고 꾸짖으셨다.
히잡이든 미사보이든, 머릿수건을 쓰게 하는 것이든 벗게 하는 것이든 의복에 관한 권력의 행사가 억압과 강요, 폭력 또는 차별의 형태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행위의 근간에 하느님의 말씀 또는 신의 뜻이 아니라 다만 인간이 만든 이데올로기와 기득권의 통제욕구가 자리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리 경전과 교리를 그 근거로 든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어두운 현실 앞에서도 탈레반의 복장 통제에 맞서는 캠페인을 벌이는 용기 있는 여성들도 있다. 이들은 주로 해외에 거주하는 아프가니스탄 출신 여성들로 소셜미디어에 화려한 전통의상을 입은 모습을 게시하며 ‘내 옷에 손대지 말라((#DoNotTouchMyClothes)’ ‘아프간 문화(#AfghanistanCulture)’ 등의 해시태그 운동을 벌이고 있다.
소셜미디어 속 여성들은 다채로운 색감에 이국적 문양이 새겨진 아프간 전통의상을 입고 반짝이는 머리 장식과 귀걸이로 자신을 표현한다. 캠페인을 시작한 역사학자 바하르 잘랄리 박사는 녹색과 붉은색이 섞인 화려한 전통의상을 입은 사진과 함께 “부르카는 우리의 문화도 정체성도 아니며, 이것이 아프간 문화”라고 트윗 했다.
인스타그램과 트위터 속 아프간 여성들이 입은 다채로운 색감과 화려한 장식의 전통의상은 히잡 착용을 고수함으로써 자신들의 소외와 분노를 표현하는 프랑스의 무슬림 청년들과는 또 다른 방식의 ‘저항하는 옷’이다. 히잡을 쓰고 벗고, 몸을 드러내고 드러내지 않고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