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생 세레나 씨는 부산에서 민주시민교육 활동가로 일하는 30대 여성이다. 사회교리로 뭉친 청년 모임 ‘사교뭉치’의 일원이었으며, 성당이 곧 자신의 놀이터이자 배움터였다고 말하는 열심한 가톨릭 청년이기도 하다.
세레나 씨는 지방 소도시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다. 천성이 밝고 활달한 아이였지만 IMF의 여파는 초등학생이었던 세레나 씨 가족에게도 그림자를 드리웠다.
저는 1991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어요. 1월 출생이라 90년생들과 친구고 백말띠예요. 백말띠에 태어나는 여자아이는 드세다는 속설이 있어서 1990년에 여아 낙태율이 특히 높았다고 해요. 백말띠라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저는 두 살 터울의 오빠보다 씩씩하고 털털한 편이었어요. 밖에 나가서 뛰어놀기 좋아하고, 그러다 넘어져서 다리에 상처가 남아도 개의치 않는 선머슴 같은 아이였어요. 아파트 주차장을 누비며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친구들이랑 뒷산에 산딸기 따러 다니면서 한참 모험을 즐기다가 해질 때가 되어서야 집에 오는 아이였어요. 그때부터 저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노는 것을 좋아했어요. 지금도 그런 면이 있는데 기질적으로 저는 많이 움직이면서 사람을 모으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인 것 같아요.
제가 태어나서 유년기를 보낸 구미는 공단이 많은 지역이었어요. 저희 아버지도 반도체 관련 공장에서 일하셨고, 어머니는 가정주부로 저희를 돌봐주셨어요. 아주 부유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네 식구가 그럭저럭 소박하게 살아가는 형편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97년도에 IMF가 오고, 이후에 아빠 회사 사정이 점차 안 좋아졌던 것 같아요. 제 추측으로는 아버지가 권고사직을 당하셨던 게 아닌가 싶어요. 아버지가 일자리를 잃게 되면서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고 부모님이 점차 다툼이 잦아지는 상황을 저도 느낄 수 있었어요.
부모님은 두 분 모두 말이 없는 편이셨고, 두 분이 결국 헤어지셨기 때문에 부모님이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결혼하셨는지 그런 서사를 선뜻 물어본 적이 없었어요. 부모님의 관계나 이혼에 관해 물어보는 것이 조금 금기시되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에게 두 분의 이야기는 앨범 속 사진으로 남아 있는 느낌이에요. 다만 지금도 기억하는 갈등 없이 화목한 우리 가족의 마지막 모습이 저에게는 어떤 이미지로 남아 있어요. 아빠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서 엄마가 운전하는 차 뒷자리에 앉아 함께 아빠를 데리러 갔던 적이 있어요. 그리고 아빠를 모시고 다 같이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저는 초등학교 1학년쯤이었던 것 같은데 저녁 무렵 공단의 스산한 풍경이나, 해 질 녘 노을 지는 거리의 모습과 함께 어떤 다툼도 없고 그저 화목했던 그 순간이 제 기억에 남아 있어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세레나 씨의 가족은 부산으로 이사한다. 새로운 환경에서 시작된 사춘기는 그에게 남들보다 일찍 철이 들어야 했던 동굴 같은 시기로 남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부산으로 이사를 했어요. 외가가 부산 쪽이어서 엄마가 외삼촌들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 같아요. 당시 구미는 IMF로 인해 일자리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었고, 부모님도 생계를 위해 더 넓은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친구들과 미처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급하게 부산으로 왔어요. 그런데 이사 오고 나서는 집안 형편이 더 어려워졌어요. 아버지 직장이 잘 안 구해져서 가정주부로 살던 엄마도 일을 나가는 상황이었고, 이사를 두 번 다니는 동안 집은 점점 더 작아졌어요.
막 사춘기에 접어들어선 저도 낯선 도시에서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어요. 제가 이사 한 곳이 신도시여서 다른 친구들은 모두 그 지역에서 자라서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한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친구들은 모두 서로 아는 사이인데, 나는 모든 게 낯설고, 집의 경제적 상황은 계속 나빠지고, 엄마 아빠 사이도 안 좋고 저도 감정적으로 좀 버거웠어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누가 알려줬다면 좋았을 텐데 저도 그때는 엄마를 너무 힘들게 하는 아빠가 밉기도 했어요. 한편으로는 사춘기였음에도 반항하거나 어려움을 토로하기보다 나라도 속 썩이지 말아야겠다 싶어서 철이 좀 일찍 든 편이었어요.
내가 학교에 잘 다니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게 엄마를 돕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지냈던 기억이 많이 나요. 다행히 학교생활에 점차 적응해 갔지만, 이사 갈 때마다 우리 집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정착하지 못하는 생활이 주는 불안감은 늘 있었어요. 또 그때 다녔던 중학교가 가족들의 돌봄에서 소외된 친구들이 많은 학교였어요. 선생님들도 아이들을 보듬거나 제대로 이끌어 주기보다는 학생들에게 애정 없고 좀 무책임한 분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학교에서도 마음을 두기 어려웠던 것 같아요. 여러 이유로 중학생 때 저는 자기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었어요. 그래서 중학교를 졸업하면서는 약간 해방감도 들었어요.
좋은 친구들과 만나고, 성당에 다시 나가면서 세레나 씨는 행복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다. 집안 형편은 계속 어려워졌지만, 세레나 씨는 이때를 인생에서 가장 밝고 생기 있던 시기로 기억한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행복한 기억이 많아요. 입학하기 전부터 학교 교복이 너무 예뻐서 빨리 중학교 교복을 갖다 버리고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싶다고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정말 입학하면서부터 좋은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제가 되게 활력을 찾게 되었어요. 물론 그때 학교 문화는 좀 폭력적인 부분이 있었지만, 벌로 발바닥 맞고, 지각하면 엎드려뻗치고 그런 억압들이 오히려 아이들을 똘똘 뭉치게 하고 서로를 더 잘 돌보게 하는 연대감을 도모하는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온종일 학교에서 공부에 시달리는 환경에서도 친구들끼리 더 끈끈해지고 추억을 많이 쌓을 수 있었어요. 지금도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난 친구들과는 아직도 연락하면서 지내요.
그리고 이때 다시 성당에 가게 돼요. 어린 시절에 구미에서 가까이 지내던 이웃 아주머니가 독실한 신자여서 그분 권유로 엄마랑 오빠랑 같이 성당에 다니긴 했었어요. 오빠랑 같이 첫영성체도 받고 어린이 미사 성가대에서 바이올린 반주를 맡기도 했었어요. 그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고 부산으로 이사하면서 냉담한 시기가 꽤 길었는데 고등학교에서 만난 친구가 주일학교 선생님 중에 잘생긴 선생님이 있다고 저보고 같이 가자고 하는 거예요. 제 친구도 성당에 같이 다닐 또래가 마침 필요했었는데, 그때 제가 걸려든 거죠. 저를 데려가기 위해 온갖 유혹과 노력으로 저를 꼬드겼어요.
그렇게 친구의 설득 끝에 궁금증 하나로 갔는데 잘 생겼다기보다는 아이들에게 굉장히 잘 대해주고 유머가 넘치는 선생님이 계셨어요. 집안 사정 때문이었는지 그 시기의 저는 뭔가 좀 억눌려 있었다고 해야 하나, 그 나이에 맞게 맘껏 표현하지 못하고 지냈는데 성당에 다시 나가면서 제가 원래 가지고 있던 쾌활한 면들을 좀 편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청소년 시기에만 누릴 수 있는 주일학교 문화 같은 걸 만끽하는 재미도 새로웠어요. 재미있는 선생님과 좋은 친구들과 만나서 성당의 문화를 익혀가는 재미로 주말을 되게 즐거운 시간으로 채울 수 있었어요.
집안 형편은 고등학교 시절에도 계속 나빠졌어요. 이사를 한 번 더 했고, 굉장히 좁은 집에서 오빠는 한참 예민한 고3이고, 엄마도 멀리까지 일을 다니는 동안 가족들은 부대끼면서 지내야 했어요. 그랬는데도 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지내고 성당에서 즐겁게 활동하면서 쌓는 추억들이 저를 되게 행복하게 했어요. 돌이켜 보면 그 시기의 제가 엇나가지 않고 어둠 속에 잠기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게 참 감사하게 느껴져요. 가난하고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래도 그 시기가 제 인생에서 가장 밝고 생기 있던 시기였어요. 엄마는 지금도 고등학생 시절 저를 떠올리면서 “그때 너는 참 예뻤다”라고 말씀하세요. 그게 생기에서 오는 예쁨이었던 것 같아요. 요즘은 그 예쁨이 그립기도 해요.
세레나 씨에게 고3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다. 아무리 힘든 시기도 함께해 주는 존재로 인해 행복한 시절이 될 수 있다고 알려준 좋은 인연 덕분이다.
저는 제 인생에서 고3 시절이 제일 행복했던 때 같아요. 보통 이 시기를 입시로 인해 힘들게 보내는데 저는 성적이나 대학에 대한 고민은 거의 없었어요. 제가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 갈 정도로 실력이 좋다면 오히려 압박감을 느꼈을 텐데 저는 제 성적에 대해서는 한계를 느꼈고 뚜렷한 목표가 있어서 그걸 성취하겠다는 욕심도 없는 편이었어요. 그래서 할 수 있는 만큼만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이었고, ‘지리’ 과목을 특히 좋아해서 좋아하는 공부는 또 가열하게 하는 그런 학생이었어요.
또 결정적으로 아무리 힘든 시기를 지나더라도 주변에 동행해 주는 누군가로 인해 나는 행복할 수도 있다는 걸 느낀 시기기도 했어요. 고3 때 다니던 성당에 새로 발령받아서 오신 신부님이 계셨는데 돌아보면 그분과의 인연이 참 특별해요. 그때까지는 특별히 신앙심으로 성당을 다녔다기보다 친구들이랑 놀러 다니는 느낌이었는데 그 신부님이 주례하는 미사에 가면 강론이 막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고3인데도 주일에는 성당에 빠지지 않고 미사에 참례했어요. 강론 내용만이 아니라 신부님의 목소리나 이미지가 저에게 굉장히 평안하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왠지 잘 맞는 사람 있잖아요? 신부님이 저에게 그런 분이었어요.
수능을 보는 날, 신부님이 부모님들께 전하는 편지를 주셨어요.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보는 수능 시험 시간표에 맞춰서 수험생 부모님들이 성당에 모여서 기도하는 피정에 초대하는 내용이었어요. 그때 저희 어머니는 냉담 중이었지만 그래도 피정에는 참여하셨어요. 신기하게도 시험을 보는 동안 엄마가 함께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다는 연결감을 느낄 수 있었어요. 또 수능 시험 끝나면 바로 성당으로 오라고 하셔서 마치자마자 갔더니 저희랑 같이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고, 수고했다고 격려해 주셨던 기억도 나요.
인생에서 되게 중요한 순간에 신앙에 대한 감각을 놓지 않도록 신부님이 많이 애쓰셨던 것 같아요. 기도 안에서 예수님과 연결된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해요. 신부님은 그 후에도 성인이 된 친구들이 주일학교를 떠나서도 계속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어요. 청년회 언니 오빠들과 만나는 시간도 따로 마련하고, 떼제 기도회를 열어서 같이 기도하는 기회를 준비하기도 하고 그렇게 저희를 계속 붙들어주셨던 게 참 감사하죠.
세레나 씨는 대학보다는 성당에서, 좋은 사람들과 이룬 공동체 속에 배우고 성장한다. 20대 내내 성당은 세레나 씨에게 놀이터이자 마을이었고, 배움터였다.
스무 살이 되면서 가족이 마지막으로 이사를 했어요. 고등학교 졸업식을 한 달 앞둔 때였어요. 부산 끝에서 끝으로 이사하면서 이때부터는 아빠와 따로 살게 되었어요. 저도 대학에 진학했고, 또 새로운 동네에서 이제 엄마, 오빠와 세 식구가 살면서 삶이 많이 달라졌죠. 그전에 살던 곳과는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 반이 걸리는 곳이어서 정을 붙였던 성당을 떠나는 게 아쉬웠어요. 그런데 제가 너무 좋아했던 그 신부님 이사 간 지역의 성당으로 발령받아서 오신 거예요. 얼른 제 발로 찾아가서 인사드리고, 청년회를 찾아가서 가입 신청했어요. 언니 오빠들이 두 팔 벌려 환영했어요. 스무 살 친구가 제 발로 청년회를 찾아온 게 너무 신기했던 거죠.
그렇게 찾아간 본당 청년회가 굉장히 성숙한 공동체였어요. 공동체에 헌신한 선배들이 잘 닦아놔서 청년회 안의 분위기나 문화가 굉장히 좋았어요. 저는 책과 문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문예창작과에 진학했지만, 고등학교 생활과 별로 다를 게 없는 대학 생활에는 회의감이 컸어요. 오히려 성당에서 좋은 어른들을 통해서 기도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면서 정말 많이 성장했어요. 대학보다 성당이 저에게 많은 걸 가르쳐 주고 저를 많이 키워낸 것 같아요.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공동체에서 섞이고 부딪히며 특히 관계에 관해 많이 배웠어요.
주말에 성당에 가는 게 저한테는 너무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도 주말 오전에 할 수 있는 빵집 알바만 했어요. 돌아보면 그 소속감이 참 소중했어요. 공동체가 주는 역동, 사람들이 주는 에너지를 듬뿍 느끼면서 그 공간이 저를 사람으로 만들었죠. 좋은 사람들이 주는 좋은 영향이 저를 이끌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대학 시절에는 청년회에서 반주도 하고, 주일학교 교사도 했어요. 토요일, 일요일 모두 성당에서 보낸 거죠. 저도 아이들을 좋아하기도 하고 아이들에게서 생기를 많이 얻기도 했어요.
진로에 대한 고민도 있었지만, 전공을 살리면서도 지역에 남아 나와 잘 맞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하게 고민하고 있었어요. 마침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교육·문화 사업을 진행하며 지역 주민들과 호흡하는 일을 하는 단체에 채용되어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작은 도서관을 운영하는 단체여서 독서와 관련된 기획 사업을 추진할 기회도 있었고 제가 가진 성향이나 지향과 잘 맞는 단체여서 운이 좋았어요. 저는 제가 신념이 뚜렷한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저의 신념이 충분히 수용되는 단체여서 스물네 살부터 서른 살까지 20대의 7년을 꼬박 바쳐 열심히 일했어요. 저에게는 좋은 동료들과 일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학교와 같은 직장이었습니다.
취업하고 보름 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왠지 꼭 가야 할 것 같아서 참석한 세월호 추모 미사에서 세레나 씨는 동갑내기 친구들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신앙인으로서 뭔가를 해야 한다고 느낄 때 사회교리는 그 답이 되어 주었고, 그렇게 ‘사교뭉치’가 탄생한다.
제가 2014년 2월에 졸업하고 4월 1일에 취업했어요. 그런데 보름 후에 세월호 참사가 있었어요. 참사 후에 주보를 보다가 정의평화위원회 세월호 추모 미사 알림이 눈에 딱 들어오더라고요. 그런 위원회가 있다는 것도 몰랐고, 주보에 실리는 교구 소식에는 별로 관심이 없을 때였지만, 이 미사는 진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혼자 추모 미사를 갔어요. 평일 저녁이었는데 사람들이 정말 많이 왔어요. 청년들은 거의 없었는데 젊은 남성 한 분이 열심히 영상을 찍는 게 되게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얼마 후에 사회교리 학교에서 여는 생태 관련 강좌에 갔는데 또 그 청년이 영상을 찍고 있었어요. 영상 찍는 일을 하는 친구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실무자였어요.
대체로 수녀님들이나 어르신들이 오고, 제 또래 사람은 그런 자리에서 보기 힘드니까 제가 먼저 말을 걸었어요. 그런데 이 친구도 저를 인상 깊게 봤는지 알아보더라고요. 그러다 서로 동갑이라는 걸 알고 서로 놀랐죠. 그때 마침 교구 노동사목위원회에서 실무자로 일하는 친구 한 명도 저희랑 동갑이었어요. 정평위 실무자로 일하던 친구가 활동가로서 기획력이 좋은 친구였어요. 그 친구 제안으로 세월호를 통해 만난 우리가 사회교리에 관해 같이 공부도 하고 활동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어요. 그렇게 스타벅스에서 만나 머리를 싸매고 지은 이름이 ‘사교뭉치’였어요. 사회교리로 뭉친 청년 모임의 시작이었죠.
사회적 문제에 관해 공감대를 이룬 청년들이 모여 가톨릭교회에는 사회교리가 있다는 것을 알리며, 이 교리를 바탕으로 우리가 뭔가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여러 활동을 펼쳤어요.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고, 사업을 제안하기도 하고, 거리 미사나 현장 연대에 함께하고, 보고서를 내고, 봉사 활동도 했어요. 그 과정에서 의심받기도 하고, “너네 본당 활동은 하냐?” 그런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그럴 때는 지치기도 했고 제안이 거절당할 때는 퇴짜 맞았다는 느낌에 분노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실망한 순간마다 돌아서려 할 때면 수도회에서 연락을 주신다든가 하는 식으로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시지는 않는다는 것을 체험했어요. 내가 알고 있던 본당, 교구 차원을 넘어 더 큰 존재로서 교회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렇게 우리를 응원해 주는 은인들에게 힘을 많이 받았어요.
저는 세월호 전에는 사회적인 문제에 관해 관심이 크지 않았어요. 세월호 추모 미사를 가고, 사회교리 학교에 다니고 사교뭉치 친구들을 만나면서, 사회적인 문제로 고통받는 이들과 연대하는 힘은 신앙 안에 있다는 걸 느끼고, 사회교리를 공부하고 알리는 활동을 시작한 거죠. 그래서 제가 만약 성당을 다니지 않았다면 저는 사회 문제에 관해 깊이 관여하지 않고 크게 관심이 없는 그저 시민사회 영역에서 일하는 직장인이었을 거예요. 제가 그리스도인이었기에 제 관심사도 활동도 더 넓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2020년, 코로나19가 시작됐다. 모임을 확장하고, 공간을 마련하며 다음 단계를 준비하던 사교뭉치도 전환기를 맞이했다. 어느덧 30대가 된 사교뭉치 멤버들도 각자의 삶에서 새로운 도전을 맞이하며, 그들 다음 세대에 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사교뭉치로 7년을 열심히 활동했는데, 신기한 게 30대가 되니까 딱 코로나19가 왔어요. 저희는 그 전부터 사교뭉치 3명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와 같은 길을 가고 싶어 하는 청년들을 더 모으자 해서 사회교리를 공부하고 싶은 청년 대여섯 명을 더 모았어요. 그리고 10명 정도 인원이 모였을 때, 앞으로 활동해 나갈 구심점이 되는 공간을 만들기로 하고 이미 공간 세팅도 어느 정도 끝난 시점이었어요. 그런데 코로나19가 오면서 모일 수 없게 되고, 결국 각자의 자리에서 일단 충실하게 살아가기로 했죠. 30대가 되면서 각자의 삶의 자리도 달라졌어요. 이직, 대학원 진학, 결혼 그런 다음 단계를 위한 결정들을 비슷한 시기에 각자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코로나19가 언제 종식될지 모르고 각자의 삶에서 새로운 시간이 열리는 상황에서 활동에 일단 마침표를 찍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모으고 마지막 모임을 했어요. 한 시기를 마무리하며, 기도도 하고 파티도 하는 시간이었죠. 그렇게 느슨한 형태로 해산했지만, 사교뭉치는 저에게는 소중한 인연이자, 신앙과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친구 셋이 만나 이루어 낸 다시 없을 형태의 연대라고 생각해요. 각자 받은 달란트가 다른 친구들이 신앙으로 엮여 서로가 서로의 목표가 된 시간이었어요. 사교뭉치 멤버들은 여전히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고, 지금도 저희는 또 다른 형태로 교차하거나 결합하면서 만나고 있어요.
한편으로는 사교뭉치를 끝내면서 우리 다음은 있을까 그런 고민을 했어요. 공간을 마련하면서 우리가 이제 30대가 되는데,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는 20대 가톨릭 청년이 있을까 자문해 보았어요. 그런데 저희가 보기에도 비관적이었어요. 우리가 했던 활동들, 우리의 관심사들을 나눌 수 있는 다음 세대가 있을까 생각하면서 좀 서글퍼지더라고요. 다음 세대의 자리까지 미처 마련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분명히 어딘가에는 그런 청년들이 있을 텐데 그런 책임감도 느꼈어요. 하지만 저는 주일학교 아이들을 만날 때면 이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건강하게 길을 열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느껴요. 꼭 그것이 조직화 된 힘이 아니더라도, 건강한 역동은 계속된다는 것을 믿고 교회에는 언제나 청년의 자리를 남기고,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레나 씨도 30대가 되며 여러 변화를 맞았다. 직장을 옮기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독립해 1인 가구가 됐다. 이제 그는 지역의 청년 여성으로서 독립된 나로 더 안전하고 건강한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새로운 활동들을 이어가고 있다.
20대 후반에 들면서부터 저는 청년이자 여성이라는 제 정체성을 관통하는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제 안의 질문이 숙제처럼 남아 있었어요. 그래서 여성으로서 내가 느끼는 고민을 동료들과 함께 나누고, 목소리를 내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여성신학과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제가 일하는 민주시민교육 영역 안에서도 성평등과 관련된 일을 확장할 수 있지 않을까 구상하고 있어요. 저는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제가 일상에서 겪은 체험이나 현상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됐어요. 내가 왜 불편하고, 힘들었는가에 관해서 여성학에 관한 책들이 답을 줬어요.
한편으로는 교회 밖에서 느꼈던 불편한 지점들이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행해지고 용인되는 문화에 의구심을 느끼기도 했어요. 내가 힘들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지점이 내가 지금 가르치는 주일학교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도 똑같이 그들을 괴롭힌다면 저는 스스로 부끄러울 것 같아요. 그래서 누군가 질문하거나 문제 제기할 때, 자매들이 겪는 아픔에 관해서 “그냥 기도해라”, “네가 참으면 된다” 그런 얘기는 정말 할 수 없다고 느껴요.
그런데 제 또래 청년 여성들과 얘기해 보면 이런 상처나 억눌린 경험들이 되게 비슷해요. 조직 문화 안에서 겪는 여러 폭력적인 체험들, 그로 인한 우울감들 이런 게 공통된 경험인 것 같아요. 그래서 왜 우리 또래 여성들의 마음 안에 우리를 힘들게 하는 지점이 형성되어 온 걸까 고민하게 돼요. 그리고 30대 초반이라는 시기가 이런 지점들이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드러나고 그 상처들과 마주하는 시기 같아요. 그래서 앞으로 이런 공통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독서 프로그램을 세팅하고 연구를 진행해 보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한편으로는 중앙이 아닌 지역에 정주하는 청년으로서 부산 지역의 청년 여성들을 연결하고 연대하는 네트워크도 만들어 가려고 해요. 부산은 대학은 많지만, 젊은 여성들에게 매력적인 일자리가 많지 않아서 특히 20대 후반에 취업을 위해 지역을 많이 떠나요. 그래서 지역에 남은 서로의 존재가 더 소중하고요. 코로나19 이후 주변에 우울감을 호소하는 청년들이 더 많아졌는데, 여성들이 몸을 좀 더 움직이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등산을 함께 가거나 팀 스포츠를 같이 해요. 1인 가구가 많은 만큼 혼자서도 잘 챙겨 먹을 수 있는 건강한 음식을 같이 해보기도 하면서 지역의 청년 여성들이 좀 더 건강하고 단단하게 이어질 수 있는 느슨한 커뮤니티를 만들어 가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