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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다고 믿은 것들의 무게 (2024년 겨울)

1991년생 요안나 씨는 영성 신학을 공부하는 박사과정생이다.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이 당연하지 않은 세상에서 외로움을 느끼던 그는 이제 한 사람이라도 더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바라며 애쓰는 연구자이자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다.
요안나 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분당에서 자랐다. 아버지와 어머니, 일곱 살 터울의 오빠가 함께 사는 중산층 가정이었다. 어머니를 시작으로 가족들은 모두 차례로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어렸을 때 저는 활달한 아이였어요. 동네 어르신들이 저더러 “장군감”이라고, “골목대장”이라고 그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아버지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였어요. 어머니랑 아버지는 중매로 결혼을 한 경우여서 두 분이 서로 엄청난 사랑을 한다기보다는 적당히 화목한 편에 가까웠어요. 어머니가 저를 가졌을 때 세례를 받으셨고 그 후로 내내 신앙생활을 무척 열심히 하셨어요. 구역장이나 소공동체장 그런 것도 맡아 하셨고, 그래서 저는 서너 살 때부터 엄마를 따라서 성당 모임에 자연스럽게 앉아있던 기억이 많아요. 반 모임이나, 성모의 밤 그런 본당 행사들이 어린 시절 저에게 되게 익숙한 풍경이었어요.
그러다 제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쯤, 사춘기에 접어든 오빠가 강박 성향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집안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어요. 저는 오빠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과 가족 모두가 힘들어하는 걸 가까이에서 지켜봐야 했어요. 오빠가 아프기 시작했을 때 저는 아직 돌봄이 필요한 어린아이였는데 오히려 그때부터는 제가 가족들의 감정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대응하게 되었어요. 사춘기를 맞으면서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실은 우울했어요. 해결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을 혼자만의 방식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애를 많이 썼어요. 방 안에서 노래를 듣거나 홀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한때는 어른들이 드세다고 할 만큼 활달했던 아이가 되게 조용하고 예민한 아이로 자라게 됐죠.
공교육을 신뢰하지 못했던 어머니는 요안나 씨를 대안학교에 보냈다. 중고등학교 6년을 보낸 대안학교는 요안나 씨의 가치관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제가 다닌 학교가 추구했던 건 공동체적인 삶이었어요. 인간들의 공동체를 넘어 생태적 측면까지 포함한 넓은 차원의 더불어 사는 삶에 관한 고민이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농사, 생태, NGO 관련 수업도 있었고, 철학 수업도 따로 있었어요. 국어, 수학, 영어 같은 교과 수업도 선생님들이 직접 만든 자료로 토론 위주로 진행되었고요. 학교생활을 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학생들이 강당에 모두 모여 4시간씩 토론하며 해결책을 같이 고민했어요. 4대강 사업이나 FTA 같은 당시의 사회적 문제에 관해서도 깊이 있게 배웠고 원하는 학생들이 있으면 선생님이 인솔해서 반대 시위에 함께 참석하기도 하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국제 개발이나 평화 이슈에 관해서도 배우고, 직접 이웃 나라를 방문할 기회도 있었고요. 좋은 학교였죠.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은 중학교 3학년에서 고등학교 1학년으로 올라가던 겨울에 태안에서 기름 유출 사고가 터졌어요. 그때 학교에서 자원봉사를 갈 사람들을 모집해서 친구들과 같이 갔어요. 방호복을 입고 종일 자갈에 묻은 기름을 닦아 내는데 닦아도 닦아도 기름이 밀려왔어요. 시커먼 바다가 파도치는데 바위에 붙은 조개들은 다 죽어 있었어요. 열심히 돌을 닦는데 같이 온 친구가 “이거 닦아도 닦아도 다 죽어 있다”라고 중얼거렸는데, 아직도 그 장면을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그때 제가 입은 방호복을 비롯해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것들이 석유를 자원으로 만든 거잖아요. 이 떼죽음에 나의 책임은 없을까 깊게 고민하게 되었어요.
돌아보면 제가 다닌 학교도 완벽하지는 않았어요. 여러 문제가 있었고 그렇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가치들이 그 안에서 얼마나 실현되었는가 생각하면 미흡한 부분이 있었죠. 또 한편으로는 사회 문제들을 마주하고 끊임없이 해결책을 고민하도록 했지만, 그 공간 자체가 너무 안전하게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었다는 생각도 하게 돼요. 학교에서는 너무 당연했던 전제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고려조차 되지 않는 상황을 겪으면서 내게 익숙한 것과 현실의 괴리도 그만큼 컸어요. 공동체를 위한 선택, 약자를 위한 선택에 대해서 고민하는 게 당연하다고 배웠고 그렇게 믿었는데 왜 인류는 항상 반대의 선택을 하는 걸까, 그런 질문이 학교를 졸업하고도 몇 년 동안 저를 떠나지 않았어요.
음악을 좋아하고 그림을 잘 그렸던 요안나 씨는 미술대학에 진학한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던져진 이상한 세상에서 영영 혼자가 된 것만 같은 시간 속에 보낸 20대 초반은 모든 게 불확실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고등학교 때 저는 공부를 그렇게 성실하게 하는 학생은 아니었어요. 수행평가 과제를 늘 늦게 내고 시험을 얼렁뚱땅 대충 보고 그런 아이였어요. 학업 성취를 위한 일들은 전혀 안 하는 대신 다른 일들에는 되게 관심이 많았어요. 예술하는 친구들이 모여서 홍대 예술 축제도 참여하고, 음악을 되게 좋아해서 인디밴드 라이브 공연을 보러 거의 매주 가고 그랬어요. 수학은 일찍이 포기해서 그 시간이면 산에 올라가서 소설이나 시집 같은 거 읽고 그랬죠. 지금 돌아보면 그 무렵 한참 집안 분위기도 안 좋았고, 공연 보고 책 읽고 한 시간이 어떻게든 그 시기를 잘 버텨내려 했던 저만의 노력이었던 것 같아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기보다는 주변에서 다들 제가 미술을 참 잘한다고 하고,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이니까 자연스럽게 미술로 진로를 정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미술대학에 진학하긴 했는데 사실 20대 초반은 너무 우울했어요. 대안학교라는 공동체 안에 있다 그곳을 벗어나 사회에 들어갔을 때 나는 이 세상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중고등학교 내내 굉장히 소중하고 중요하게 여겨지던 가치들이 현실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걸 계속 확인하는 시기였고 많이 외로웠어요. 대안학교 출신들이 대체로 겪는 어려움이기도 해요.
그 무렵 좋아했던 건 아이슬란드 음악이었어요. 또 그때 세계 곳곳에 설치된 관광용 라이브 카메라 사진들로 작업을 했는데 가장 좋아했던 게 아이슬란드에 설치된 카메라가 포착한 풍경이었어요. 아이슬란드 수도 중앙의 호수를 비추는 카메라인데, 그곳의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거든요. 아이슬란드 음악을 들으며 그곳의 풍경을 바라보는 게 제 위안거리였어요. 그때 저는 집에서도 편히 있지 못했어요. 어디에도 내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컸고, 나와 얽혀 있는 모든 것들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은 생각이 너무 간절했어요.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로 1년 정도 돈을 모아서 늘 바라만 보던 호숫가 바로 옆에 방을 하나 얻어 한 달 정도 지내다 돌아왔죠.
아이슬란드에서 돌아온 한국에는 요안나 씨가 할 일이 없었다. 작가가 되기로 한 것도, 취직을 하기로 한 것도 아니었다. 그 무렵 어머니의 권유로 다녀온 메주고리예 성지 순례가 신앙생활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렇게 순례에서 만난 인연들이 그를 폴란드로 떠나게 했다.
잠시 수도회에서 일하며 유학을 준비해서 스물여섯에 폴란드로 떠났어요. 수도회 일을 도우면서 자연스럽게 수도 생활을 가까이에서 체험하고 신앙도 깊어진 상태여서 가톨릭 전통이 일상에 깊이 자리한 문화에 관한 궁금증이 있었어요. 또 한편으로는 제가 뿌리를 두고 있는 사회에서 멀어져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 싶다는 마음도 강했고요.
그런데 유학 시절은 정말 힘들었어요. 여태까지 제가 알고 있는 세계관이 다 무너지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가장 먼저 마주한 건 인종 문제였죠. 거리를 걸어가면 모두가 저를 쳐다볼 정도로 동양인이 희귀한 분위기였어요. 그때 그 시선을 너무 싫어하는 자신을 보면서 제 안에 존재하던 인종에 대한 경계를 생각하게 됐어요. 예를 들면, 나는 왜 저들이 나를 중국인이라고 오해할 때 그렇게 싫은지, 단지 저 사람들의 문제인지 아니면 나 역시 중국인에 대한 혐오나 편견이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제 안팎에서 일어나는 인종과 관련된 권력의 문제를 굉장히 많이 고민했어요.
또 하나는 교회에 대한 믿음이 많이 흔들렸어요. 유학한 시기에 폴란드는 극우 정당이 들어서면서 정치와 종교가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띠었고, 혐오 범죄가 많이 일어났어요. 난민과 외국인을 향한 혐오 범죄도 많았고, 여성 인권에 관한 인식도 전반적으로 퇴보하고 있었고요.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던 건, 성소수자 혐오였어요. 국가가 성소수자를 ‘적’으로 규정하고 그 혐오를 정부와 교회가 계속 부추기는 상황이었고 그러다 보니 폭력 사건도 많이 있었죠. 실제로 제 친구가 레인보우 플래그가 걸려있는 바 앞에 서 있다가 폭력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어요. 제가 자주 가던 카페는 주인이 게이 커플이었는데 제가 다녀간 바로 다음 날 카페가 공격당하기도 했고요.
그런 사건들이 지척에서 일어나면서 유학생들 특히 유색인종 친구들 사이에서는 “독립기념일에는 밖에 나가지 마라”, “밤에는 머리카락 색을 보이지 마라” 그런 이야기들이 돌기도 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주일에 성당을 가면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발언을 사제들이 서슴없이 하는 분위기였어요.
폴란드에서 요안나 씨는 더 깊은 모순을 마주했다. 당연히 해야 할 선택과는 늘 반대로 가는 세상, 특히 교회가 누군가에게는 안전하지 못한 공간이며 때로는 서슴없이 상처를 주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 무렵에 도대체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지, 교회가 저렇게까지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에 관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퀴어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어렸을 때 자기도 종교를 믿고 싶어서 교회나 성당에 가보려고 했는데, 갈 때마다 동성애 혐오 발언을 들어서 갈 수가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예전엔 그런 친구에게 “그래도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라고 말을 했었는데 저는 폴란드에 가서야 그런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어요. 교회는 정말 일부 사람들에게는 위험한 곳이고, 안전하지 못한 곳이라는 걸 뼈저리게 체감하게 된 거죠.’
폴란드에서 성지순례 여행사에서 잠시 일했어요. 같이 일하는 동료들은 굉장히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이었어요. 어느 날 퀴어 퍼레이드 얘기가 나왔는데, 그들은 행진이 열리는 길가에 성소수자의 회개를 위해 묵주기도를 하러 간다고 하더라고요. 직장 상사는 식사 중에 갑자기 저를 보면서 “나는 그들이 비정상이고 생각해”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요. 저도 퀴어 퍼레이드에 참여하긴 했는데, 거기서 저는 머리 색이 너무 눈에 띄니까, 한여름에 옷을 뒤집어쓰고 행진했어요. 혹시 해고당할까 봐요. 그런 일들을 겪으며 계속 질문이 일었죠. 도대체 이런 일이 왜 일어나고, 교회는 왜 저러는 걸까? 저들은 왜 사람들을 계속 분류하고, 그 체계 안에 사람을 가두려 두는 것일까?
또 한편으로는 정체성이라는 것이 연대하는 사람들 속에서 새로운 배제를 만들어내는 것에 관한 질문도 계속 생겨났어요. 폴란드에서 유학하면서 제가 작업했던 주제도 인간의 정체성 문제, 정체성 정치의 문제점들에 관한 것이었어요. 그런 경계를 넘어 인간의 보편적인 것은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는 작업을 계속했죠. 다행히도 학교 안의 선생님들과 동료들이 제가 가진 문제의식을 잘 탐구할 수 있게 도와주고 지지해 주었어요. 한국에 계신 신부님과 매달 전화로 영적 동반도 할 수 있었고요. 덕분에 상처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시기를 무사히 보내고 돌아올 수 있었어요.
미술계에서 요안나 씨의 작업을 주목받고 있었고, 작가로서 독립적으로 살 수 있겠다는 희망도 보았다. 그러나 스물아홉, 요안나 씨는 신학을 공부하고 성소수자에 관한 연구와 활동을 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시점에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 될 선택을 한 거죠. 계속 폴란드에 남아서 미술을 하며 사는 삶과, 한국에 돌아가 신학을 공부하고 성소수자 관련 연구와 활동을 하는 삶, 이 두 가지 길 사이에서 고민했어요. 두 길을 놓고 비교해보니, 미술은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하고 싶었던 거고 길도 열리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살다가 죽었을 때를 상상해보면 사실 남는 게 없을 것 같았어요. 뭔가 남긴다 해도 그게 저한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반면 후자를 선택했을 때는, 비록 불안정한 삶이더라도 적어도 뭔가 함으로써 제가 고민하고 괴로워했던 문제들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지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늘어난다면, 그게 더 의미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와 신학대학원에 입학했어요.
신학 공부를 시작한 이유는 유학하는 3년 동안 정체성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작업을 하면서 관련 책들을 굉장히 많이 봤어요. 탈식민주의, 여성학, 퀴어 이론 등을 공부하면서 여러 가지를 고민했죠. 그러면서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언어화해서 분석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어요. 하지만 교회 안에서 힘들어하는 퀴어 당사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결책은 찾기 어려웠어요. 당시에는 관련 책이나 논문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당사자들이 경험하는 실존적인 위기를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 교회가 바뀌기까지는 오래 걸리는데 그때까지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런 이야기가 너무 없더라고요. 그리고 교회에 대해서도 좀 더 알고 싶었어요. 교회가 어떤 근거로 저런 주장을 하는지, 전통적인 교회의 입장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대안을 찾고 싶었어요.
신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큰 배움은 교회에 대해 더 이해하게 된 거예요. 이제는 나침반처럼 '교회는 이래야 한다'는 게 있으니까, 교회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봐도 예전보다는 덜 휘둘려요. 질문 자체도 ‘교회는 여전히 저런 모습도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렇다면 이제 뭘 할 수 있을까?’라는 방향으로 변화했죠. 지금 연구는 성소수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사실 그건 제가 인간의 경험 자체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에요. 주로 이야기되는 경험보다는 잘 이야기되지 않고 가려져 있는 경험들에 관심이 많아서 지금은 퀴어들과 그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역동, 그 안에서 하느님은 어떻게 활동하시는지, 우리는 어떤 하느님 체험을 하는가에 관해 새로운 방식의 표현들을 포착하고자 애쓰고 있어요.
지금 3년째 가톨릭교회 안의 퀴어와 앨라이들의 공동체에 함께하고 있는데 이 안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이 사실 굉장히 재미있어요. 아픔도 있고 슬픔도 있지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새롭고 좋을 때가 많거든요. 하느님에 대한 강한 갈망 같은 것들을 느끼고 배우기도 하고, 그런 것들을 좀 더 많은 신자가 접할 수 있게 다양한 방식으로 제안하고 싶어요. 그래서 저는 연구와 현장 활동 사이의 균형을 잘 잡으려고 애쓰고 있어요. 현장에서 본 것들을 연구에 녹여내고, 연구에서 느낀 한계를 현장에서 실현하면서, 저에게는 사실 연구도 활동 같고, 활동도 연구 같은 상태예요.
신학을 공부하는 드문 평신도 청년인 요안나 씨는 자주 교회 안의 청년을 대표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왜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느냐?”는 너무 자주 받는 질문이 불편하다.
'청년들이 왜 떠날까'라는 질문을 너무 많이 하는데, 저는 사실 떠난 청년들에 관해 얘기하기 전에 지금 교회에 남은 청년들에게 먼저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어요. 사실 저도 가끔 교회를 떠나고 싶어요. 그래도 남아있는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로부터 받아온 것들이 많이 있고, 여전히 교회에는 좋은 것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동시에 교회에 실망하고 상처받아서 떠나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봐요. 어떤 이들에게는 그게 정말 생존의 문제일 수도 있거든요. 교회를 떠나지 않으면 더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요. 교회에 실망하고 상처받았음에도 남은 친구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사랑하려 노력하고 교회와 여전히 계속 대화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저 역시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고 농담처럼 말하지만, 그래도 교회와 계속 대화하고 싶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가 바뀌지 않을 거고, 그럼 계속해서 교회 안에서 상처받고 불안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결국 남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교회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고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고 봐요. '왜 떠났느냐'라고 물으면, 이미 많은 사람이 그 이유에 관해 얘기해 왔는데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싶어요. 게다가 '세상이 너무 세속적이라서 그렇다'라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종교라는 제도 안에 속해있지는 않지만, 복음적 가치에 공감하고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오히려 더 충실하게 살아가는 청년들도 많거든요.
교회가 더 많은 사람을 아우르고, 더 많은 사람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이 된다면, 다시 돌아오고 싶은 이들이 돌아오고, 새로 오고 싶은 이들이 모이지 않을까요? 퀴어 관련 활동하면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교회를 떠났던 친구들이 우리 공동체를 계기로 돌아오거나 새롭게 신앙으로 초대받는 친구들을 볼 때예요. 교회가 조금만 더 환대의 손짓을 한다면, 마음을 열고 대화해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어요. 하지만 교회는 여전히 자신의 입장에서 '왜 나를 떠나가'라고 질문하는 것 같아요.
결국 여전히 교회에 남은 사람들이야말로 남은 쪽의 마음과 떠난 사람들의 마음을 모두 이해하고 있어요. 그 마음에 귀 기울이고 그들이 요구하는 것들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는지 고민할 때, 비로소 안과 밖이 모두 연결되는 교회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