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생 혜영(가명) 씨는 제주도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한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혜영 씨는 2년 전 제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20대 후반부터 10년 가까이 수도회에서 보냈다. 어린 시절에도, 청년기에도, 수도회에서도, 그리고 지금도 혜영 씨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늘 고민하는 사람이다.
혜영 씨는 따뜻하고 살기 좋은 동네, 서귀포 효돈에서 유년 시기를 보냈다. 일하는 부모님 대신 할머니가 어린 혜영 씨와 오빠를 보살펴 주었다.
1986년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태어났어요. 모태신앙이었고 세례도 굉장히 일찍 받았어요. 오히려 출생 신고는 좀 늦게 해서, 서류상으로는 세례받은 날이 태어난 날보다 먼저예요. 저희 외조부님이 일찍이 선교사들과 만나면서 믿음을 갖게 되었고, 아버지도 결혼하면서 자연스럽게 신앙을 받아들였어요. 가톨릭 집안이었던 만큼 저도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했어요. 근데 제 신앙은 집안의 영향도 있지만 제주에서 태어났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 것 같아요. 눈을 들면 하늘이 보이고 푸른 산과 맑은 공기가 바다가 가까이 있었어요. 그 안에서 태어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제게는 하늘의 가장 큰 선물임을 느껴요. 그 선물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요. 지금도 제주에 살고 있으니까요.
저희 부모님도 모두 제주 사람이에요. 부모님은 맞벌이였기 때문에 저는 할머니 손에 자랐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3대가 함께 사는 집이었어요. 그래서 할머니의 영향이 부모님 이상으로 컸죠. 할머니와 맺은 관계가 성격을 비롯해 제 어린 시절의 많은 부분을 결정했어요.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이 있으셨어요.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상처받은 기억이 많아요. 주변 사람들에게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되게 싫어했어요. 워낙 작은 마을에서 자랐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다 서로 알고 지내다 보니 창피하다고 느꼈죠. 할머니는 그 시절 다른 할머니들처럼 남아 선호 사상이 강했어요. 그런데 저는 온순하고 순종적인 성격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할머니하고 사이도 좀 어려웠죠.
아버지를 좋아하면서도 아버지가 실망스러웠고, 아버지의 폭력으로 6개월에 한 번은 꼭 집이 난장판이 되는 상황을 겪다 보니 내면에 불안이 컸어요. 겉으로는 사교적이고 쾌활한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마음을 잘 못 열고 어두운 면이 있었죠. 할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깊었고 할머니에게는 아버지가 아픈 손가락이었던 것 같아요. 반면 어머니에게는 함부로 하고 그런 게 있었어요. 그런 모습을 보고 자라면서 저는 어릴 때부터 나는 나 스스로 챙겨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가족들에게 뭔가를 기대하지 않았어요. 작고 말라서 별명이 ‘소말리아’일 만큼 왜소한 아이였지만 나는 내가 알아서 살아야 한다고 믿었어요. 늘 주변을 경계하면서 약해 보이는 걸 싫어했던 자존심 강한 아이였어요.
가족은 혜영 씨에게 안정감을 주지 못했고, 평온한 상황에서도 자주 불안을 느꼈다. 늘 마음이 불안했던 어린 혜영 씨에게 성당은 숨 쉴 곳이 되어주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그때 아버지가 신부님한테 기도를 부탁했어요. 어떤 기도였는지 잘 생각나지는 않지만, 기도 안에서 나를 진심으로 대하는 손길을 느꼈어요. 그 어린아이가 본능적으로 신앙은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 이후부터는 성당에 더 열심히 나가게 되었고, 성당에서 배우는 교리나 성경 이야기도 너무 재미있었어요. 성경을 필사하면서 예수님의 매력에 빠졌죠. 집보다 성당을 더 좋아했고 가족보다 본당 신부님에게 크게 의지했어요.
제가 첫 영성체를 할 때 신부님이 이때 예수님께 바치는 기도는 이루어진다고, 소원을 빌어 보라고 하셨어요. 그때 제가 드렸던 기도는 천국에 가게 해달라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성인들의 어린 시절 기도처럼 하느님을 너무 갈망해서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었어요. 그저 지금 사는 삶이 너무 힘드니까 하느님이 빨리 나를 데려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어린 제가 느끼는 삶이 그만큼 별로 행복하지 않았던 거예요. 그런데 성당에 가면 행복하고, 기쁘고 재밌으니까 제 온 마음이 성당을 향해 있었어요.
그렇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는데 본당 신부님들은 임기가 끝나면 떠나시잖아요? 저를 깊은 신앙으로 이끌며 좋은 영향을 주셨던 신부님이 떠나신 게 큰 충격이었어요. 내가 의지하고 있던 사람이 사라져버리면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느낀 거죠. 그 무렵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마음을 많이 닫았고 정말 의지할 곳이 없었어요. 가장 가까이에서 보살펴주던 할머니와도 많이 부딪혔고 저도 할머니가 무섭기도 했어요. 내 가족이 제 딴에는 창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속마음을 터놓지도 못했고요.
친구들은 저를 땅만 보면서 다니는 아이라고 불렀어요. 육지에서 전학한 친구가 제 생일 선물을 챙겨줬을 때 고마움이 아니라 화를 냈죠. 우리가 친구도 아닌데 왜 나한테 선물을 주냐고 말했어요. 경계심이 강한 아이였죠. 신부님이 떠나신 것도 실은 그냥 갈 때가 돼서 간 건데 제 마음속에는 혹시 나 때문에 떠나신 게 아닐까 하는 슬픔이 있었어요. 참 취약하고 미성숙한 시절이었죠. 그때는 제가 겪는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생각에 신앙에서도 위로받지 못했어요. 내 현실과 내가 믿는 것이 너무 분리되어 있다고 느꼈고, 삶의 모든 면에서 예민하고 날카로운 사춘기를 보냈어요.
혜영 씨에게 청소년기는 질 수 없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사는 것 같은 힘겨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 헤매던 시절에도 하느님을 만나는 길은 열려 있었다.
중학생 무렵 인터넷이 막 보급되면서 커뮤니티 사이트가 유행이었어요. 가톨릭 음악 방송 동호회에서 대학생 언니 오빠들과 만나 생활 성가를 많이 알게 되고 저도 생활 성가 방송을 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 성가 하나를 듣게 됐고, 그 순간이 저에게는 굉장한 하느님 체험이었어요.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권성일 씨의 노래였는데 그 노래 안에서 나를 정말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꼈어요. 그때부터 나를 어떻게든 지탱해 주는 하느님을 느끼고, 하느님께서는 분명 존재하시는구나 믿을 수 있게 되었어요.
하느님을 만나는 길은 열려 있다는 생각에 영적 체험을 갈망하면서 기도하고 공부하며 조금씩 제가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그 무렵 저한테 큰 영향을 준 친구의 말 한마디가 있어요. 고등학교 때 친구가 제게 “너는 왜 혼자 이 세상 모든 짐을 다 지고 있는 표정으로 사냐?”고 물어봤어요. 그 얘기를 듣는데 진짜 뒤통수를 딱 맞은 거 같았어요. 고등학생 시절 저는 늘 가시 돋친 모습으로 살았거든요. 별로 친하지 않던 친구가 건넨 말이 더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했어요.
그때부터 나의 못난 부분을 고쳐보려고 되게 노력했어요. 욕도 안 쓰기로 하고, 친구들에게 좀 다정하게 대해보려 애쓰고, 또 정말로 예수님을 닮는다는 건 뭘까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 같아요. 마침 그 무렵 평신도 주일에 교리교사 선생님이 신부님 대신 강론하셨어요. 그 말씀이 기억에 남았어요. 지렁이는 평생 진흙 속에서 살지만 자기 몸에는 흙을 하나도 묻히지 않는다는 얘기였어요. 누군가 아무리 큰 고통과 어려움 속에 산다고 하더라도 그 고통이 그 사람 몸에 붙어 그의 존재를 바꾸지는 못한다는 얘기였어요.
그 강론이 깨달음을 줬어요. 내 아픔 속에 갇혀 헤매기만 했던 제가 비로소 주변을 볼 수 있게 되었어요. 삶이 고통스럽더라도, 그 고통이 나를 바꾸지 않는다면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질문하기 시작했어요.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나와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진로를 고민하던 고등학교 3학년 시절, 혜영 씨는 처음으로 성소를 느낀다. 하지만 아픈 현실로부터 도망치는 건 아닐까 고민했던 혜영 씨는 우선 대학에 진학해 사회학을 공부한다.
고3 때는 밤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자정쯤이면 독서실을 나와서 성당에서 매일같이 한 시간 동안 불 꺼진 성당에 가만히 앉아있었어요. 하느님께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물어보고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름대로 돌아보기도 하고요. 그러다 어느 순간 어린 시절 처음 하느님의 손길을 느낀 순간을 떠올렸어요. 그때까지는 어린 나를 위해 기도해 준 신부라는 한 사람의 손길을 기억했다면 기도하면서 그때 나를 축복해준 것은 진짜 하느님의 손길이었다는 걸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수도자로 사는 삶에 대해 생각했어요.
어려서부터 성당에 다녔으니까 “너는 자라서 수녀님이 되거라” 그런 얘기를 늘 들었어요. 그런데 자꾸 어른들이 수녀가 되라고 하니 오히려 저항감이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사가 끝나고도 집에 돌아가지 않고 성당에 살 수 있는 신부님과 수녀님이 참 부럽기도 했어요. 처음 성소를 느꼈을 때는 현실 도피는 아닐지 의심했어요. 지금 내 삶이 너무 힘드니까, 가족에게서 벗어나고 싶으니까 떠나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한 건 아닐까? 그때 하느님께 약속드렸어요. 지금은 대답드릴 수 없지만, 다시 저를 부르신다면 그때는 정말 그 부르심을 따르겠다고요.
대학에서는 인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철학이나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제 삶의 고통을 공부 안에서 들여다보고 싶었거든요. 육지로 대학을 갈 형편은 아니어서 제주에 있는 국립대학교를 진학하기로 한 상태에서 철학과를 가겠다고 하니 선생님이 좀 당황하셨어요. 성적도 충분한데다 졸업 후에는 취업을 고려해야 하는 형편이니 사회학과를 권해주셨어요. 사회학과가 사회복지학 전공도 겸하고 있었거든요.
막상 사회학을 공부해 보니 참 재밌었어요. 사회적 갈등, 계층 문제를 두루 볼 수 있었고 철학이나 역사를 공부할 기회도 많았고요. 또 제주의 아픈 역사가 어떻게 오늘날의 제주와 우리 가족의 구체적인 현실을 만들어왔는지를 복합적으로 이해하는 시간이기도 했어요. 우리 할머니가,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가 그리고 내가 못나고 미숙해서 힘겨웠던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문제들이 우리를 아프게 했던 걸 깨달았어요. 그러면서 자신에게만 몰두하던 것을 넘어 나보다 더 고통받는 사람들, 더 어려운 사람들,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현실을 볼 수 있었어요.
대학 시절에도 신앙은 혜영 씨 삶의 구심점이었다. 가톨릭 학생회 활동과 예수살이 공동체와의 만남은 더 넓은 신앙의 길로 혜영 씨를 이끌어주었다. 한편 할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은 혜영 씨에게 다시 삶에 관한 질문을 던져주었다.
가톨릭 학생회 활동도 열심히 했어요. 당시 가톨릭 학생회에 천주교 신자가 별로 없었어요. 그나마 냉담 중이거나 군대에서 세례받은 친구들이 명맥을 이어가는 가운데 알음알음 좋은 사람을 데려오다 보니 오히려 비신자의 비율이 더 높았어요. 신자는 아니었어도 구체적 현실이나 사회 문제에 관해 종교는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젊은이들이 모였죠. 근데 그 무렵 교구의 청년 사목 방향과 저희 모임이 잘 맞지 않는 면은 있었어요. 교구에서는 성경 공부나 신앙생활 중심으로 모임을 운영하고자 했는데 저희 학교 가톨릭 학생회는 비신자가 많다 보니 갈등이 좀 있었어요.
결국은 비신자 학생들은 모두 떠나고 기존에 있었던 회원들도 교회의 완고함에 실망해서 떠나게 되었어요. 그때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사목이란 무엇일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예수님은 모두를 품고 더 큰 구원을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교회 밖에서 교회와 닿기를 바라는 사람들조차 오히려 등을 떠미는 건 아닌가 그런 회의감이 있었죠. 학창 시절 내내 고민했던 것 같아요. 내 삶을 희망으로 이끄는 길을 설명해주지 않는 교회, 성경 속 예수와 교리에서 만나는 예수 그리고 내가 만나는 예수의 모습이 너무도 달라 힘들기도 했어요. 그런 고민이 저를 흔들었습니다.
그 무렵에 예수살이 공동체를 알게 되었고, 처음으로 혼자 육지에 나가 공동체와 만났어요. 한편으로는 두려웠지만 제가 지닌 고민에 답을 주는 길로 하느님이 이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리고 그 만남이 저를 크게 변화시켰죠. 완전한 대답을 얻은 것은 아니었지만 예수님과 처음으로 인격적으로 만나는 기회였던 것 같아요. 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하느님 아버지와의 만남을 꿈꾸며 평생을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이 깊게 와닿았어요. 그리고 그런 예수님을 닮고자 노력하는 젊은이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게 제 시야를 넓혀 주었어요. 예수를 따르면서 웃을 수 있게 되었달까요?
사실 그 시절 가장 큰 사건은 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신 일이에요. 대학교를 졸업할 때쯤 두 분이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나셨어요. 두 분은 제게 애증의 존재였어요. 할머니는 저를 키워주신 분이면서 제가 늘 저항했던 존재였죠. 아버지가 간 이식이 필요했어요. 저는 아버지에게 간을 이식해 드리기 싫었어요. 그만큼 상처가 너무 깊었던 거죠. 이때 일은 두고두고 후회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돌아가셨어요. 그렇게 보호자이자 깊은 고통을 주었던 두 분을 떠나보내고 나니 정말 삶은 뭘까 생각하게 되었어요.
사회복지사로 일하던 혜영 씨는 다시 한번 자신을 수도 성소로 부르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시작한 수도 생활은 공동체의 삶 가운데 자신의 약함을 처절하게 마주하는 은총의 시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사회복지사로 학대받은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시작했어요. 아동학대, 노인학대 피해자를 돌보는 일을 하며 20대 후반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나를 만들어 온 체험들이 하느님의 은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본당 활동도 좀 더 진지하게 시작했고 아이들에게 내가 전해줄 수 있는 것을 고민하다 교리교사를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성경 공부도 하고 성경 필사도 하면서 제 마음 안에 변화가 일었어요. 그때 5년 후에 지금의 나를 돌아보았을 때 후회하지 않을 일을 하라는 말을 듣고, 큰 영향을 받았어요.
그즈음 본당 수녀님이 새로운 소임지로 떠나시면서 “너는 수도자가 되어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본인은 이런 얘기를 잘 안 하는데 왠지 이번에는 말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고 하시면서요. 신기하게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고등학교 3학년 때 하느님과 했던 약속이 떠올랐어요. 하느님께서 저를 다시 부르신다면 그때는 그 부르심을 따르겠다고 했던 기억이 생생했어요.
수도 생활은 완전히 새로운 삶이었어요.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수도 생활을 시작했지만, 함께 사는 법, 우리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니까 조금씩 자기를 깎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모나고 다듬어지지 않은 서로를 받아들이고 품는다는 게 어렵죠. 그래서 많이 싸워요. 공동체 생활 가운데 깨고 나와야 하는 껍질들이 많았어요. 그게 많이 힘들었어요. 그래도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목표 하나로 같이 살면서 자신을 만나고 그 가운데 하느님을 찾는 여정이죠. 수도 생활은 진짜 재밌고 즐겁고 보람찼어요, 밤을 새워 피곤해도 감사했어요.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는 성인의 고백을 아주 조금이지만 손에 잡아볼 수 있었죠.
그러던 중 기도하다가 깨달은 것이 그때까지 나는 누군가를 한 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나 자신을 포함해서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었던 거예요.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제대로 믿은 적 없다는 걸 깨달으며 내 약함을 처음으로 인정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비로소 내 상처와 마주하고 어려운 숙제였던 아버지와 할머니를 마주했어요.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었어요. 잊을 수 없는 체험, 제 뼈와 살에 새겨진 체험입니다. 파스카였어요. 새롭게 창조되는 기쁨이자 감사의 시간이었어요. 이제 새로운 길을 갈 수 있겠다고 그때 느꼈어요. 그때 은총 안에 치유와 용서를 경험했던 것 같아요.
수도 생활은 부족한 나를 받아들이고 가장 나약한 모습까지 진실하게 마주하는 인생의 전환점이었어요. 물론 결과적으로 극복하지 못한 부분은 여전히 남아 있었어요. 수도 공동체에서는 서로에게 투명하지 못하면 함께 사는 게 좀 힘들어요. 서로를 힘들게 하죠. 솔직함이 자신과 타인을 자유롭게 하는데 그런 면에서 제 안에 있는 벽을 쉽게 허물지 못했어요. 또 ‘순명’이 수도 생활에서 무척 중요한 부분인데 제 이해가 부족했어요. 순종은 조건 없는 인내만은 아닌, 함께 나아가는 공동체의 길이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하느님께 의지하는 길, 공동체와 함께하는 길이 어떤 것일까 고민했다고 자부하지만, 한편으로는 외로웠기에 기도하지 못한 순간이 있었고 지극히 인간적으로만 생각하기도 했고요.
지금은 이렇게 수도회에서 나와 살고 있어요. 사실은 잘 모르겠어요. 더는 수도회에서 나온 게 상처가 되지는 않지만 왜 나오게 된 것일까 분명한 이유는 잘 몰라요. 한동안 많이 힘들었어요. 사실 정말 행복했거든요. 온종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나를 바꿔주었던 그 공동체를 잃었다는 상실감이 깊었어요. 공동체 생활이 힘들기도 하지만 서로의 부족을 마주하면서 함께하는 공동체의 힘은 정말 커요. 그래서 교회가 공동체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긴다고 생각해요. 시노달리타스의 근본도 거기에 있겠죠. 그 힘은 서로를 지탱해 주고 변화하게 하고 나약해진 우리를 이끌며 빛을 보여주는 힘이에요. 이제 저는 그런 공동체를 잃어버린 것이죠.
수도회를 나와서 보낸 몇 개월이 가장 힘든 시기였어요.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쉬고 싶다고도 생각했지만, 여행을 떠날 에너지조차 없었어요. 처음에는 이유를 찾아야만 할 것 같아서 나를 탓하기도 수도회를 탓하기도 하다가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빨리 직장을 구했어요.
수녀회를 떠난 지 어느덧 3년째, 혜영 씨는 제주로 돌아와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살아간다. 수도회에서 세상 속으로 삶의 자리는 바뀌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한 고민은 여전하다.
이제는 수도회에서 나오게 된 이유를 찾지 않아요. 요즘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잘 살아갈 수 있을지, 누군가의 방법을 흉내 내는 게 아니라 나만의 방법으로 어떻게 예수를 닮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예전의 제가 주어진 현실에 허덕이느라 아파했다면 이제 좀 더 단단하게 서서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하면서 제 믿음을 살고자 애쓰고 있어요.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게 제 소명이라는 걸 조금은 느끼고 있고요. 또 제가 살아가는 제주의 역사와 슬픔, 직장에서 만나는 어르신들이 겪는 어려움 이런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며 살아가려 애쓰고 있어요.
모든 일을 이해하고 해결할 수는 없더라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나는 어떻게 헌신할 수 있을까 고민해요. 고민으로만 끝나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살아요. 그리스도인은 의미를 찾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도 작은 것에서 의미를 찾으면서 살아가는 편이에요. 주변에서는 저한테 되게 피곤하게 산다고들 해요. 사실 좀 피곤하기도 해요. 근데 저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아직도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계속 고민해요.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고민하고 고민하면서 살아갈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