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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을지라도 떠나는 항해 (2022년 가을)

1988년생 도윤호 씨는 예수회 수사다. 서른다섯 윤호 씨는 입회 9년 차지만 여전히 예수회 한국관구에서 가장 젊은 예수회원 가운데 한 명이다. 예수회 양성과정에 따라 수련기와 철학기, 캄보디아에서의 실습기를 마친 윤호 씨는 오는 가을부터 보스턴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한다.
윤호 씨는 부천에서 태어나 경기도 남부 지역에서 자랐다. 본당 가톨릭 청년회에서 만난 부모님 덕분에 윤호 씨의 어린 시절은 성당에서 보낸 시간으로 가득 차 있다. 믿음이 두텁고 약자에 대한 연민이 깊었던 부모님의 성향은 그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저는 1988년 7월 부천에서 태어났어요. 유년 시절과 청소년기는 수원, 안양, 군포 그 주변에서 계속 보냈어요. 경기도 신도시는 어디나 다 비슷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딱히 고향이라고 할 만한 곳이 없어요. 대신 부모님이 두 분 모두 인천 출신이셨고, 가족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니까 제 뿌리와 관련된 마음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인천이 아닐까 싶어요.
아버지는 59년생이고, 어머니는 64년도에 태어나셨어요. 두 분 모두 인천에서 성장하셨고요. 부모님은 성당에서 만나셨어요. 아버지가 청년회장이고 어머니가 부회장이셨는데 그렇게 만나 결혼까지 하셨어요. 양가 모두 다들 신자세요. 구교우 집안은 아니고, 친가는 고모가, 외가는 이모가 먼저 세례를 받고 가족들이 모두 다 신자가 된 경우에요. 제가 태어났을 무렵에는 이미 온 가족이 성당을 다니고 있었어요.
저는 어렸을 때 성당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신앙심이 깊다는 게 뭘지 잘 모르겠지만 남들이 볼 때 우리 집은 신심이 깊은 그런 가정으로 보일 거예요. 두 분 모두 성당에서 활동을 많이 하셨고, 제가 외아들인데 수도회에 가 있으니까 그렇게 보일만 하죠. 어머니는 초등부 교사를 오래 하셔서 교구에서 감사패를 받기도 하셨어요. 저는 첫영성체 교리도 어머니를 따라 3번인가 들어서 정작 첫영성체 반에 올라가서는 이미 배울 게 없었어요. 신앙이 막 깊은 아이라기보다는 성당에서 보내는 시간이 일상이었던 거죠. 첫영성체하고, 복사단에 들어가고 청소년 레지오를 하고 그런 식으로 차근차근 단계를 따라 본당 활동을 다 경험했어요.
아버지는 굉장히 성실한 분이세요. 아버지가 퇴직하시면서 “나는 성실함 하나로 회사 생활을 했다”고 하신 게 저한테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자신에 대해 자랑하는 게 전혀 없는 분이셨거든요.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분이면서도 늘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셨어요. 회사에서도 관리자 직급인데도 일반 사원들, 생산직 직원들 편에서 최대한 배려하다 조직 안에서 좀 힘든 일을 겪기도 하고 그런 분이세요.
저는 어머니를 많이 닮았어요. 어머니도 약자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 대한 연민이 큰 분이세요. 어머니는 당신에게는 돈을 못 쓰세요. 뭘 사지를 못해요. 그런데 남들을 도울 때는 그냥 툭툭 도와줘요. 그런 성향이 제게도 영향을 줬겠죠. 부모님은 두 분 다 욕심이 크거나 야망이 있는 분들이 아니었어요. 저에게도 제가 뭘 했으면 좋겠다거나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한다거나 그런 얘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으세요.
어린 시절 윤호 씨는 또래보다 조숙한 아이로 여겨졌다. 차분한 성격, 욕심부리거나 떼쓰지 않는 기질은 그를 어른스러운 아이로 보이게 했다. 한편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사건이었던 외할머니의 죽음은 잊을 수 없는 이미지로 어린 윤호 씨의 마음에 새겨졌다.
저한테 가장 오래된 기억은 저희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이에요. 그날이 하나의 영상으로 각인되어 있어요. 외할머니가 집에서 돌아가셨는데 할머니를 한쪽에 모시고 그 앞에 흰 천을 커튼처럼 천장부터 내리고, 어머니랑 이모들이 다 그 앞에서 엎드려서 우는 모습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어릴 적 친구들이랑 놀이터에서 놀다 보면 가끔 갑자기 퓨즈가 나가는 것처럼 금방 죽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래밭 안으로 내가 스며들어서 없어질 것 같은 느낌을 자주 느꼈어요. 그런 기분이 들 때면 어머니한테 “나 금방 죽을 것 같아” 그런 얘기를 하곤 했어요. 어릴 때니까 철학적으로 죽음에 관해 사유한 것은 아니지만 막연히 늘 죽음이라는 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아요.
요즘처럼 비가 자주 올 때면 “엄마 나 힘이 하나도 없어” 하고는 가만히 누워있기도 하고 날씨 영향을 많이 받기도 하는 정서적으로 예민한 아이였어요. 아마 그런 면이 또래보다 조숙해 보였던 것 같아요. 행동이 차분하고 생각이 많은 아이니까. 한편으로는 욕심도 많지 않아서 자기가 괜찮다고 생각하면 누가 사탕을 두 개 줘도, 한 개만 가져가는 그런 아이였다고 해요. 경쟁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꼭 이루고 싶은 목표나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게 안 좋은 쪽으로 보면 약간 무기력한 면도 있었던 거죠.
어머니는 요즘도 농담처럼 “나는 네가 어릴 때도 많이 안아보지도 못했다”고 그러세요. 저는 갓난아기 때도 아기 담요에 눕혀 놓으면 엄마가 담요 위에 손만 올려도 짜증을 내고 그랬대요. 마치 아기가 담요 위는 내 공간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방학 숙제도 안 하고 놀다가 개학 3일 전부터 밀린 것을 막 하는데 부모님이 좀 도와주려 해도 양이 너무 많아서 버겁고 부담이 돼서 울면서도 안 도와줘도 된다고, 스스로 어떻게든 하는 그런 아이였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또 누구랑 비교해서 저 친구보다 잘해야지 그런 마음은 별로 없었어요. 근데 제가 생각한 만큼, 필요한 만큼은 스스로 해내야 하는 거죠. 그런 면이 지금도 좀 있어요.
윤호 씨는 자신의 10대를 사춘기를 사춘기로 보낼 상황이 아니었던 때로 회상한다. 열다섯 윤호 씨는 캐나다로 홀로 조기 유학을 떠났다. 청소년기에 겪은 2년간의 캐나다 생활은 윤호 씨에게 살면서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시기면서, 가장 깊은 고독을 체험했던 시기로 남았다.
청소년기에는 마치 블랙홀처럼 모든 걸 빨아들이는 사건이 있었어요. 중학교 때 저는 되게 평범한 아이였어요. 그냥 모범생이었어요. 공부도 곧잘 하고, 선생님 말 잘 듣고, 학급 임원도 하고 그런 아이. 그렇다고 아주 뛰어난 학생은 또 아니고요. 저는 중학생이 될 때까지 학원 같은 데를 거의 안 다녔어요. 대형 학원가가 멀지 않은 동네에 살면서도 대한민국 사교육 시장이 되게 생소한 아이였어요.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 봄에 친구 한 명이 자기랑 같이 캐나다에 가자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저에게는 그게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여서 상상조차 안 됐어요. 그런데 그날 집에 돌아와서 엄마한테 그 얘기를 하니까 어머니가 완전히 마음이 움직이셨어요. 자식이 하나뿐이고, 당신께서 해보지 못한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그렇게 겨우 3개월 뒤에 저는 캐나다에 가는 비행기를 탔어요. 그때가 2002년인데 사실 그해가 조기 유학 붐의 절정이었어요. 당시에 반에 한두 명은 다 갔고, 제가 떠난 후에도 저희 반에서도 1년 사이에 몇 명이나 갔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솔깃해서 보내긴 했지만 사실 어머니도 별로 정보가 없었죠. 영어 공부도 하고 준비를 좀 해야 하는데 저는 유학원을 통해서 그냥 몇 달 만에 토론토행 비행기를 탔거든요.
캐나다는 가을에 학기가 시작하니까 고등학교 1학년으로, 거기서는 9학년으로 입학하게 됐어요. 그런데 입학식 날 학교에 갔다가 좀 놀랐어요. 동양인이 너무 많았거든요. 제가 첫해에 다닌 학교는 유학원을 통해서 추천받은 공립학교였어요. 그 학교가 공부를 잘한다 해서 갔는데 알고 보니 아시아계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학교여서 성적이 좋은 편이었어요. 저는 영어 못하는 동양인이니까 관심도 받고 도움을 받으면서 공부하겠다는 기대가 있었는데 워낙 아시아계 2세나 3세 이민자 학생이 많으니까 저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잖아요. 이게 생각했던 거랑 다르다 싶으면서 생존 본능이 막 발동되더라고요.
그해가 살면서 공부를 가장 열심히 했던 해예요. 대입 때도, 예수회에 와서도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한 적은 없었어요. 살아남기 위해서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어요. 영어 실력이 부족하니까 간단한 연습 문제를 푸는 숙제도 몇 시간이 걸렸어요. 수업 시간에는 말을 똑바로 못하니까 아무도 저랑 팀을 이루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제가 영어를 못해도, 공부를 못하지는 않았으니까 과학 실험 같은 게 잘 되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잖아요? 뭔가 잘못되고 있어서 “이게 아닌 것 같아” 하면 걔네가 “아니 네가 뭘 알아” 그런 식으로 대하는 거예요. 내가 말을 못 하지 이걸 모르는 게 아닌데 열도 나고 그랬죠.
그렇게 보낸 첫해 성적이 나쁘지 않았어요. 상위 20%에게 주는 학업 우수상도 받았어요. 첫해 거둔 성적으로는 괜찮았죠. 조기 유학생 중에서도 잘한 편이었고, 이미 몇 년 전에 이민 와 영어를 잘하는 친구들과 비교해도 잘한 편이었어요. 그런데 그러고 나니 학교를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저는 평범한 가정에서 하나뿐인 자식에게 더해주고 싶다는 이유로 가족들이 많은 희생을 해서 유학을 왔다는 책임감을 많이 느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한국 사람이 많은 환경에 있다 보니 나는 공부하러 온 건데 너무 한국 친구들이랑 어울리지 말아야겠다, 좀 더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으로 옮기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두 번째 해는 좀 더 북쪽 교외 지역의 학교로 전학해서 보냈어요. 거의 다 백인들이 다니는 학교였고 홈스테이 가정도 한국 가정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 가정으로 바꿔서 지냈고요. 그 무렵 아주 힘든 시간이 찾아왔어요. 적응하고, 말도 들리고, 앞가림을 좀 하게 되니까 오히려 외로움이 그때부터 몰려오기 시작했어요. 그때 많이 무너졌죠. 공부도 제대로 안 하고 학교를 빠지기도 하고 그랬어요. 친구도 별로 없었고 성당도 안 다녔어요. 외진 곳이라 너무 멀기도 했지만 사실 모든 일이 다 귀찮았어요. 스트레스를 받으면 많이 먹는 편이기 때문에 살도 되게 많이 쪘어요. 몸도 정신도 다 무너진 그런 상태였죠.
그때 어머니가 먼저 한국에 돌아오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처음에는 대학까지 마칠 생각으로 갔는데 그때쯤 되니 여기서 이렇게 지낼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돌아왔죠. 그렇게 캐나다에서는 2년 정도 있었어요. 저는 10대를 사춘기를 인지하지 못하고 보냈어요. 캐나다에서 혼자 견딘 어려움이 너무 커서 한동안은 밤이 오고, 어두운 고독 속에 조용히 있으면 마음이 많이 힘들었어요. 고독감, 외로움 이런 것이 되게 버거웠거든요. 다시 중학생으로 돌아가서 친구가 캐나다에 가자고 하면 갈지 잘 모르겠어요. 얻은 것도 많지만 힘들었던 것도 분명히 있으니까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시간을 통해 시야가 넓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기본적으로는 소심한 편이었는데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말한다기보다는 토하는 느낌으로 얘기했던 경험이 쌓이면서 점점 자기표현을 잘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너무 힘들었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틀을 깨고 나와서 성장할 수 있는 체험이기도 했고, 어떤 면에서는 좀 더 저를 자유롭게 한 경험인 것 같아요.
어린 나이에 마주한 깊은 고독 뒤에 보낸 한국에서의 고등학교 생활은 남들보다 앞서겠다는 경쟁심이 없던 윤호 씨에게는 마냥 좋은 시간이었다. 윤호 씨는 어떻게 사는 삶이 행복한 삶인지 고민하고, 대입의 좁은 문 앞에 좌절하기도 하며 성인의 문턱을 통과했다.
캐나다에서 돌아와 중학교 3학년으로 복학했어요. 그때 공부를 바짝 해서 외국어 고등학교에 진학했어요. 고등학교 때는 말도 편하고, 친구들이랑 마음도 맞고 하니까 그 생활 자체가 좋았어요. 물론 그 안에서도 경쟁이 심했지만, 캐나다에서 돌아온 저는 이제는 별로 모범생이 아니었어요. 외국 생활 후에 저는 자기주장도 강해지고, 표현도 많이 하고, 좀 더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그런 아이가 되어 있었어요, 나중에 제가 수도회에 들어갔다는 얘기를 듣고 고등학교 친구들이 “아 윤호는 그때도 좀 달랐던 것 같아” 그런 말을 했대요. 물론 핀잔도 많이 들었어요. 제가 무슨 말을 하면 친구들이 “아 도윤호 또 이상적인 얘기한다” 그러곤 했죠.
밖에서 보는 저는 경쟁이나 입시에 아예 관심이 없는 학생처럼 보였던 것 같아요. 물론 저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런 고민을 많이 했어요. 저한테 제일 중요했던 건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였어요. 그런데 특별히 하고 싶은 건 없었어요. 저한테 중요한 건 의미였던 것 같아요. 판검사가 되거나, 돈을 많이 번다든가 하는 게 저한테는 크게 매력적이지 않았어요. 행복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변에 계신 신부님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때까지 만난 신부님들의 삶이 검소하고 단순하면서도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삶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런 면들이 저한테 좋게 다가왔어요. 저런 삶이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 행복한 삶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교구 예비 신학생 모임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교구청에서 열리는 모임을 빠지지 않고 다니면서 고3이 되었어요. 그런데 저는 그때 같이 봉사활동 동아리를 하면서 사귀게 된 여자친구가 있었어요. 그전에는 ‘가슴이 시린다’는 표현이 단순히 문학적 수사라고 생각했는데 그 친구가 아프다는 얘기를 듣고 가슴이 시리다는 게 실제로 느껴지는 감각임을 깨닫고 되게 놀랐어요. 풋풋한 시절이었고 누군가를 그렇게 좋아했다는 게 저에게는 참 좋은 기억이에요. 그러는 동안 한편으로는 예비 신학생 모임을 나가면서 여자친구를 사귀면 안 되지 않을까 그게 마음에 걸렸어요. 그래서 예신을 안 나가기 시작했죠.
그러고 나니 일반 대학에 진학해야 하는데 고민이었죠. 저는 어릴 적부터 적성 검사를 하면 예술적 기질이나 성향이 굉장히 높게 나왔어요. 고3이 되고 보니 도저히 경영학과나 법학과 이런 공부는 저랑 맞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가진 기질을 좀 학업적으로 풀어낼 기회를 고민하다가 미학과에 가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서울대에 갈 수 있을 정도로 내신 관리가 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내심 다른 학교라면 장학금을 받고 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었어요. 그런데 수능을 너무 못 봤어요. 하필이면 외국어 시험을 망쳤어요. 갑자기 문제가 안 읽히면서 제대로 시험을 치르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서 울었어요. 결국 재수했는데, 정말 어쩔 수 없이 한 거였어요.
대치동에 있는 재수학원에 등록하고, 테헤란로 뒷골목에 있는 고시원에서 살면서 다시 수능을 준비했어요. 그때는 내가 괜히 너무 이상적으로 생각하다 이렇게 된 게 아닐까 나도 친구들처럼 연고대 경영학과를 가야지 하는 마음도 있었어요. 그런데 사실 그 시절이 되게 안 좋은 기억이어서 저는 그때 기억을 다 지워버렸어요. 그리고 수능을 봤는데 똑같은 상황이 반복됐어요. 트라우마가 됐는지 외국어 시험을 똑같이 망쳤어요. 아이러니하죠. 캐나다에 가서 2년을 보내고 왔는데 영어 때문에 대학을 못 간다는 게. 삼수를 할 수는 없어서 성적에 맞춰 대학에 갔어요.
원하던 대학에 가지는 못했지만, 감정을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던 윤호 씨에게 예술대학으로의 진학은 한편으로는 설렘을 주었다. 그러나 대학이나 전공이 소속감을 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가톨릭 동아리와 군대에서의 신앙생활을 통해 잊고 있던 성소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대학 생활은 즐거우면서도 나는 여기에 속한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느낌도 있었어요. 전공하게 된 영상 분야 자체가 제게는 생소하기도 했고, 예술대학에는 독특한 친구들이 워낙 많잖아요. 제가 그동안 어울린 친구들에 비해 사고방식도 자유롭고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싫지는 않으면서도 내 것 같지는 않은 생각이 들었어요. 또라이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또라이는 아닌데 그런 거죠.
그 와중에 가톨릭 동아리 활동에 정을 많이 붙였어요. 너무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해서 학과에서는 좀 서운해할 정도로요. 동아리 회지에 제가 가톨릭 동아리에 대해서 ‘사람은 많지만, 사람을 만날 수 없는 대학에서, 사람을 만나는 곳’ 그런 식으로 썼던 기억이 나요. 저에게는 대학 생활의 전부이자 모든 것이었죠. 가톨릭 동아리에 그렇게 헌신한 것이 믿음이나 신앙의 차원이라기보다는 어렸을 때부터 제 생활에 젖어있었던 문화였기에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느껴졌어요. 그때는 동아리에서 열심히 어울려 놀면서 성소에 관한 생각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그러다 군대에 갔는데 저는 군 생활이 되게 힘들었어요. 위계질서를 너무 싫어하는 사람이어서 군 생활이 특히 처음에는 너무 괴로웠어요. 그런데 사람이 참 간사하죠. 힘드니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게 되었어요. 운이 좋았던 게 부대가 커서 부대 안에 성당이 있었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부님과 면담도 하고 나름대로 기도 생활을 꾸준히 했어요. 매일미사 책에 있는 성무일도를 매일 바치고, 밤에는 다시 기도하고 성찰하면서 그렇게 살았어요. 그러다 보니 외적인 불편이 있지만 내적으로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하루를 규칙적으로 보내는 삶이 나를 억누르고 억압하기보다는 자유롭게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수도회에 가면 내가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군대에서는 삶이 단순해지잖아요. 제 경우에는 제 안의 내면의 움직임에 대해서 좀 더 예민해지게 되더라고요. 생활이 통제되면서 오히려 내면에 집중하게 되고, 영적인 민감성이랄까 그런 게 커졌어요. 제 감정을 잘 들여다보고 좀 더 성숙하게 풀어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그때 자주 생각했던 것이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조금 더 나은 나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어요. 신앙적으로 보면 하루하루 완덕(完德)에 좀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 그런데 그게 지속이 힘들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나를 사로잡은 어두운 부분, 그늘진 부분이 주기적으로 찾아오고 어렵게 지켜온 노력이 무너지면서 바닥을 치고 그런 기복이 반복되었어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어두움과 고독, 무기력함은 윤호 씨에게 성소를 다시 고민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윤호 씨는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완덕을 향하는 길을 하느님 안에서 걷고자 했다. 그러나 수도회 입회로 모든 어둠이 한순간에 걷힌 것은 아니었다.
제 성소는 개인적 차원이 강했어요. 완덕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싶은데 그게 저만의 힘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 안에서라면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어머니가 예수회 후원회원이셨기 때문에 집에 예수회 소식지가 많았고 그렇게 성소 모임에 다니게 되었어요. 예수회를 처음 찾아왔을 때 예수회센터에 새겨진 예수회의 모토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를 보고 가슴이 뛰었어요. 저희 어머니가 제게 늘 “요한아,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사람이 되도록 해라”라고 하셨거든요. 그때 잘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좋았어요.
예수회 입회는 참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살면서 후회하지 않는 선택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대학 시절 가톨릭 동아리 활동 정말 찐하게 한 거랑 다른 하나는 예수회 입회한 거예요. 다른 거는 다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두 가지는 후회가 없어요. 저는 입회하고 수련자 생활이 진짜 행복했어요. 과장을 약간 보태면 항상 꿈꿔왔던 그런 생활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바라는 게 명확하게 있었잖아요. 삶의 의미, 내적 행복을 찾고 싶었던 거니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나를 억누르고 끌어내리는 것 같은 감정들을 제 삶에서 잘라내고 싶었는데, 저는 수도회에서의 삶으로 가능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쉽진 않았어요.
한 번은 당시 관구장 신부님과 면담하다가 제가 가진 힘듦을 얘기했어요. 그때 신부님이 가만히 들으시더니 “그것이 윤호 수사님의 광야네요”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게 저에게 굉장히 영향을 줬어요. 제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셨잖아요. ‘광야’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니까 많은 것이 명확해지는 느낌을 받았고 그 이후부터는 제 어두움에 대해서 약간 애정이 느껴졌어요. 없어졌으면 하는 모습이지만 동시에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면이었음을 뒤늦게 인정하고, 깨닫게 되었어요. 제가 가진 예술적 기질이나 창의성도 다 그 광야의 우물에서 길러내는 것이라고 비로소 느꼈어요. 가장 나다운 것이 바로 거기 있다고 생각하니까 이제는 그런 면을 내 안에서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걸 안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저한테 그게 회심의 순간이에요. 제 내적인 동기로 시작된 성소의 여정을 그때부터 조금씩 밖으로 돌릴 수 있었어요. 성소 여정에서 자기 안에 충분히 머무는 것이 너무 필요한 시간이고 제가 너무 원했던 것이지만, 그 이후로는 좀 더 주변을 바라볼 수 있었어요. 저한테는 가장 좋은 체험이죠. 제 바람이 있다면 예수회원으로 죽는 것이에요. 그게 가장 큰 삶의 목표예요. 그리고 이 길에서 좀 밝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저는 수도자는 기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건 수도자의 당위인 것 같아요. 기쁘지 않다면 애써 이렇게 살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 수도회 생활하면서 어려운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게 제 희망인 것 같아요.
2014년 입회하고 1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스물일곱에 입회했던 윤호 씨도 어느덧 30대 중반이 되었다. 2022년의 대한민국에서 30대의 천주교 수사로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윤호 씨는 수련 시절 떠올린 배의 이미지를 나누었다.
수련원 시절에 밤에는 대침묵을 해요. 입회하고 맞은 첫 부활절 전야에 미사를 드리고 방에 올라와 누웠죠. 2인 1실을 썼는데 같이 방을 쓰던 수사님께 말을 걸었어요. 제가 수련기 2년 동안 대침묵을 그때 딱 한 번 어겼어요. “형, 나는 가라앉을 때가 된 배가 항구에서 막 떠나려 하는데 막 뛰어가서 그 배에 올라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그렇게 얘기했는데, 그게 제가 수도회에 온 것에 대해 가진 이미지였던 거죠. 입회하고 몇 달이 안 되었을 때인데, 침몰하려는 배에 마지막으로 올라탄 것 같은, 배가 막 떠나고 있는데 굳이 달려가서 잡아타고 만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있었어요. 그런데 왜 그랬을까 물어보면 사실 답은 잘 모르겠어요. 그 답은 제가 평생 찾아야 하는 것 같아요.
다만 저는 배가 향하는 방향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어요. 배는 지금도 막 가라앉는 중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기적이 일어나서 항해를 떠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설령 항해 중에 배가 가라앉더라도 우리가 향하는 방향은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저는 기질적으로 무기력하고 우울한 면이 있었지만 제가 그걸 견디지 못해서 도망치듯이 수도회에 온 건 아니거든요. 수도회에 오면서 저는 제가 가진 많은 가능성을 봉헌하면서 왔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가라앉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탄 배는 어쩌면 되게 매력적인 선택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도피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저는 배가 향하는 방향에서 여전히 희망을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