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호 경향신문 기고
함께 걷는 길 위에서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의 한 과정을 이루는 교구별 시노드 진행이 한창이다. 특별히 이번 시노드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친교, 참여, 사명’을 주제로 진행된다. 개인적으로는 함께 걷는 교회를 향한 기치로 제시된 ‘친교, 참여, 사명’이라는 키워드 하나하나가 곧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을 이루는 가치로 느껴져 다시 한번 이번 시노드를 통해 우리가 이루어갈 공동체의 모습을 곱씹어 보게 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번 세계주교시노드 개막 연설에서 교회의 모든 여정과 활동에 구성원 모두의 실제적인 참된 참여가 있어야 하며, 서로 경청하는 것이 교회의 핵심인 친교와 사명이 추상적으로 남지 않게 하는 중요한 의무라고 강조했다. ‘시노달리타스’라는 낯선 말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분분한 가운데 ‘교회 구성원 모두의 실제적이고 참된 참여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상호 경청을 통한 친교와 사명’이 곧 우리의 의무라는 교황님의 말은 이해의 실마리가 될 것이다.
‘시노달리타스’의 우리말 번역에 관해 논의한 끝에 제시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2021년 추계 정기 총회 결과 또한 “시노달리타스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 ’식별‘을 위해 모든 하느님 백성이 친교 안에서 함께 참여하고 경청하며 논의하는 여정의 구조와 정신을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시노달리타스에 관한 여러 논의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말은 무엇보다도 ‘경청’이다. 여기서 경청은 교회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가운데 서로가 서로에게 경청하는 ‘상호 경청’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경청과 소통
소통(Communication)이 단순히 정보의 전달이나 홍보 수단만을 뜻하지 않음을,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소통은 존재로서 길을 드러내는 삶 그 자체임을 지난 칼럼에서 다루었다. 이때 나를 넘어 타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는 ‘경청’은 진정한 소통을 위한 필수적인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경청은 단지 상대의 말을 주의 깊게 잘 듣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전달하고자 하는 말의 내용은 물론이며, 그 내면에 깔려있는 동기나 정서에 귀를 기울여 듣고 이해한 바를 상대방에게 표현하는 과정까지 이르는 것이 진정한 경청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다양하고 서로 다른 하느님 백성이 어떤 위계도 없이 그러나 신앙이 우리에게 허락한 동일한 힘 안에 하나 되어 더불어 걷는 여정의 시작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또한 모두의 참여를 통한 공동 식별과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친교는 위계적이고 권위적인 소통 구조를 허물고 경청을 통한 진정한 소통의 길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물론 교회 공동체가 이전에 경험해 본 바 없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이번 여정에 관한 오해와 우려가 교차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아래로부터의 목소리가 얼마나 잘 전달될 것인가, 어렵게 낸 목소리가 그저 형식에 그치는 것은 아닌가에 관한 회의적인 시선에서 비롯된다. 공동체 별로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함께 식별한 목소리가 그저 전달되는 것에 그친다면 이는 진정한 경청의 과정이라고 볼 수 없고, 이때 참된 소통을 통한 전체 교회의 친교는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 진정한 경청에 이르는 열쇠라고 할 수 있는, 말 넘어 존재하는 동기나 정서를 이해하고 이를 다시 상대방에게 표현하는 ‘피드백’의 과정이 손쉽게 생략될 위험이 있다.
사명을 전하는 통로
제프리 로빈슨 주교의 저서 「성·권력·교회」는 가톨릭교회 내 성과 권력의 문제를 들여다보며 이 문제를 넘어서는 방법을 제안한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지속적으로 교회 전체가 성장할 자유를 얻으려면 교회의 토대가 되는 믿음에 관하여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며, 하느님 백성 전체의 목소리가 응답에 반영될 때 우리는 훨씬 더 건강할 수 있다고 추동한다. 개방적이고 솔직한 논의를 통한 건강한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위기에 처한 교회가 다시 사랑과 희망의 표징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믿기 때문이다. 책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2008년 발간되었지만 성찰의 방향은 이번 시노드가 제시하는 길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한편 로빈슨 주교는 “훌륭한 생각들은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제안들은 죄다 거부당하기 일쑤”라며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표현들을 거부하는 것은 곧 훌륭한 생각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문장은 하느님 백성 전체의 참되고 실질적인 참여와 구성원 모두의 상호 경청을 통한 친교라는 추상적인 명제에는 동의하면서도 이를 구체화한 구체적인 제안에는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거부당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읽힌다. 일부 신자들의 이번 시노드에 관한 회의적 시선에도 이미 교회 안에서 상처받은 비슷한 경험들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스도인에게 또한 교회 공동체에게 커뮤니케이션은 사명을 전하는 통로다. 그러나 이 통로는 막힘없이 번듯한 길이 아니다. 오히려 시끄럽고 울퉁불퉁하며 고군분투하는 길이다. 단지 말하고 듣는 것을 넘어 서로를 돌보고 살피며 이해한 바를 다시 표현하는 과정까지 이르러야 만하는 고단하지만 참된 소통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