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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다할 수 없는 마음을 나누기 (2024년 여름)

1993년생 레아(가명) 씨는 노래를 쓰고, 부르는 싱어송라이터다. 말로 전할 수 없는 마음을 노래하는 레아 씨에게 신앙은 감히 표현할 길이 없는 상처와 겸허히 더불어 걷게 하는 또 하나의 언어가 되어 주었다.
레아 씨는 칠 남매 가운데 여섯 째로 자랐다. 신앙심이 돈독했던 어머니는 아이들을 하느님의 선물로 여기며 낳아 길렀다. 대가족 안에 자란 어린 시절은 레아 씨에게 행복한 기억들과 자기 목소리를 내세우기보다 상황을 먼저 살피는 수줍은 성격을 동시에 남겼다.
저희 부모님은 연세가 많으세요. 40년대, 50년대 출생이시고요, 아버지는 울릉도에서 태어나셨고, 울릉도와 대구에서 자라셨어요. 어머니는 대구 출신이고, 저도 대구에서 자랐어요. 저는 형제가 많아요.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어요. 언니가 둘이 있고, 오빠가 셋 그리고 남동생이 한 명 있어요. 아무래도 어린 시절은 가족들과 보낸 시간이 제일 많아요. 어릴 때는 그 시간이 참 좋았어요. 그런데 동시에 저는 막내 여동생이었으니까 가족 안에 저보다 나이가 많은 윗사람이 많은 거잖아요. 그래서 혼나는 게 늘 두렵고 그랬어요. 자아가 생기기도 전에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관찰하고 파악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좋은 기억들이 많아요. 어린 시절에 저는 성탄과 성주간을 너무 좋아했어요. 어머니는 신심이 무척 깊었고 저희는 어머니께서 들려주는 성서 이야기와 성인 성녀들의 이야기를 늘 들으며 자랐어요. 성탄 때면 가족들이 함께 밤 미사를 다녀와서 아이들은 거실에서 다 같이 자요. 아침이면 머리맡에 종류별로 선물이 놓여 있었어요. 성 목요일이면 어머니 아버지가 저희에게 모카빵이랑 포도 주스를 주셨어요. 부모님은 포도주를 드시면서 저희에게 우리는 오늘 성 목요일 만찬을 하는 거야 이렇게 알려주셨어요. 엄마 아빠는 저희에게 그런 추억을 많이 남겨주셨어요. 그 순간들이 되게 좋았어요.
물론 좋은 기억만 있는 건 아니에요. 형제가 많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가족 안에서도 위계 같은 게 생기기도 했어요. 어머니 아버지 말씀에 순종해야 하고, 큰 언니, 큰 오빠는 더 권위를 갖는 그런 부분이 있죠.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잘 굴러가려면 어쩔 수 없이 서로가 맞춰야 한다는 걸 어릴 때부터 느꼈어요. 지금도 저는 그런 면이 있어요. 개인으로 보다는 공동체 안에 묻어가는 걸 되게 중요하게 여겨요. 어디에서나 나도 모르게 내가 어떻게 더 배려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어요. 가족들은 항상 서로 배려하고 맞춰가는 덕목을 강조하는 편이었고, 저는 말수가 없고 잘 받아들이는 성향이어서 더 그런 사람으로 자랐어요.
그런데 동시에 제 안에는 내 목소리를 내고 싶은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런 열망도 있었어요. 어쩌다가 서툴게 내 안의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게 가족들에게 상처를 줬던 경험이 있어요. 그런데 그게 저한테 너무 큰 상처로 남았어요. 내가 진짜로 느낀 것들, 내 안의 상처를 솔직하게 나누었을 때 그게 소중한 사람에게 오히려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래서 내 이야기를 표현하는 게 아직도 편하지 않아요. 내뱉기보다는 삼키는 게 익숙한 편이에요.
어린 시절에 저에게 위로가 되었던 건 피아노가 있는 방이었어요. 저희 둘째 오빠가 고등학교 때까지 피아노를 쳤어요.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포기하게 되었지만, 너무 좋은 연주자였기 때문에 가족 모두가 오빠의 꿈을 응원했어요. 아이들이 많은 집이니까 방이 모자란 데도 방 하나를 비워 오빠가 피아노를 연습하는 방으로 꾸며두었어요. 그리고 오빠가 없을 때는 제가 들어가서 피아노를 치고 책을 읽으면서 숨어 있었어요. 오빠가 피아노를 그만두고 나서도 그 방은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그리고 나중에 제 첫 노래도 그 방에서 썼어요.
신앙은 어린 시절 레아 씨와 가족들의 일상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형제들 모두가 사춘기를 통과하며 신앙에 부침을 겪었다. 레아 씨도 마찬가지였다. 물려받은 신앙의 의미를 확인하고 고민하는 시기가 왔다. 한편 언니 오빠들이 하나둘 집을 떠나며 대가족이 함께 보내는 시간으로 분주했던 레아 씨의 삶도 변화를 맞는다.
어느 순간 느낀 게 제가 성당을 가라고 하니까 그냥 가는 거예요. 사실 성당에 가도 행복하지 않았거든요. 성당에서도 저는 다른 곳에서와 똑같이 눈치 보고, 교리교사 선생님들이나 신부님, 수녀님들이 나를 혼내시진 않을까, 나를 싫어하시지 않을지 그런 생각을 하는 아이였어요. 한편으로는 성당도 똑같이 차별도 있고 상처를 주고받는 공간이라는 걸 점차 알게 되면서 마음의 부대낌도 있었어요. 어느 날은 미사를 드리다가 제가 성체의 의미를 하나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순간 주어진 모든 걸 당연하다고 느끼고 받아들였던 어린 시절을 뒤로하고 진짜 내 신앙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던 것 같아요.
그 무렵 우리 가족에게 큰 영향을 줬던 일이 있었어요. 제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저희 큰 언니가 수녀회에 입회했어요. 어머니는 자녀들 가운데 큰 언니를 가장 먼저 떠나보내면서 굉장히 마음 아파하셨어요. 하느님께 바친다고 생각하고 자녀들을 길렀지만, 인간적으로는 힘들고 아프셨던 거죠. 그런 엄마의 부서진 내면을 제가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많이 지켜보았던 것 같아요. 남들 모르게 꺼이꺼이 우시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고요. 큰 언니의 입회는 저에게도 큰 충격이었어요. 사실 저는 입회하는 당일까지도 언니가 어디로 가게 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언니는 다 같이 예쁘고 차려입고 길을 나선 어느 날 우리 모두를 차례차례 안아주고 봉쇄 수녀원의 창살 속으로 걸어 들어갔어요.
언니가 우리를 떠나 버렸다는 생각에 무척 슬펐고, 저는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언니가 언젠가 집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엄청 많이 썼어요. 하루하루 우리 집에서 일어나는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적어 언니에게 보냈어요. 나중에 언니가 차마 그 편지들을 버리지 못하고 저에게 다시 돌려줬어요. 어느 순간부터 더는 답장이 오지 않는 편지를 보내는 일을 그만뒀지만, 그만큼 언니의 입회를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언니의 입회를 시작으로 가족들에게도 변화가 생겼어요. 오빠들도 하나둘씩 대학에 진학하며 집을 떠났어요. 그리고 막내마저 일찍이 서울로 유학을 떠나며 제가 고등학생이 될 무렵에는 집에 남은 아이가 저뿐이었어요. 어머니도 동생을 돌보러 서울에 올라가시면서 북적이던 넓은 집에 아빠랑 저 둘만 남게 되었어요.
고등학교 2학년, 레아 씨는 미국으로 1년간 교환학생을 다녀왔다. 형제들과 달리 진로를 선뜻 정하지 못하던 레아 씨에게 미국에서 보낸 1년은 미처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는 귀한 기회였다. 예술로 자신을 표현하고 싶다는 열망과 어머니의 기대 사이에서 레아 씨는 자신만의 길을 열어갔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에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다녀왔는데, 사실 그때가 한참 대입을 준비할 시기니까 흔한 경우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저희 어머니가 결단을 내린 이유가 있어요. 저희 언니 오빠들은 제 앞가림을 잘하는 편이었고 대학도 다들 좋은 학교로 진학했어요. 어머니는 마땅히 길을 못 정하고 있는 제가 걱정이었던 거죠. 사실 그때도 저는 음악을 좋아했고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어머니는 전혀 모르셨어요. 그만큼 제가 티를 내지 않는 아이였던 거죠. 그나마 제가 유일하게 마음 붙이고 하는 게 영어여서 불쑥 미국에 가게 되었어요.
1년 동안 가족과 떨어져 보낸 시간이 약간은 외로웠지만, 일종의 자유로움도 느꼈던 것 같아요. 제가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큰 사람이라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어요. 미국에서 보낸 1년 동안 저는 미술이랑 음악 수업이 너무 좋았어요. 또 그렇게 수줍음이 많으면서도 연기 수업을 들으며 사람들 앞에서 독백 연기를 하곤 했는데 그때는 스스로에 놀라기도 했어요. “내가 이런 걸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하고요.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로 나라는 사람을 표현하는 시간을 미국에서 처음으로 가졌던 것 같아요. 그리고 미국에서 돌아온 저는 그 전과는 같은 모습이 아니었어요.
한국에 돌아오고서는 바로 대입을 준비했어요. 원래는 막연하게 국제기구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려고 했어요. 미국에 다녀온 경험도 인정받아서 나름대로 그 분야에서 인정받는 학교에 붙었는데, 사실 어머니가 원하던 대학은 아니었어요. 스스로에게도 어떤 실망감 같은 게 있었어요. 저에게 많은 영향을 줬던 둘째 오빠가 피아노를 그만두고 짧은 시간에 공부해서 입시에 성공한 게 제게는 큰 충격이었어요.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도 오빠처럼 하고 싶다, 오빠가 간 학교를 나도 가고 싶다, 그런 마음이 있었나 봐요. 꼭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 오빠가 다니는 대학에 들어가고 싶다는 게 재수에 도전하게 된 하나의 이유예요.
그런데 사실 진짜 이유는, 저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더 솔직하게는 이미 그때 음악을 하고 싶었죠. 재수를 고민할 때도 언니 오빠들이 조언을 많이 해줬어요. 음악 전공자였던 둘째 언니는 음악은 나중에도 할 수 있다고 했어요. 대학에서의 전공이 삶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얘기였어요. 그때 이미 회사원이었던 큰 오빠는 자기 인생을 돌아봤을 때,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는 너무 컸다고 얘기해 주었어요. 그 얘기가 도움이 많이 됐어요. 후회하게 되더라도 해보고 후회하자는 생각으로 재수에 도전했고 미대에 들어갔어요. 정말 열심히 그림 그리고 공부했던 그 시간이 지금도 저에게는 큰 힘으로 남아 있어요.
목표하던 대학에서 원하는 공부를 하며 시작된 20대는 레아 씨에게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20대 초반 레아 씨에게 일어난 몇 가지 사건은 한동안 자신에게만 몰두하던 레아 씨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상처 입은 존재들의 곁에 깊이 머물게 했다.
동생의 커밍아웃은 제 삶에 다른 사람이 정말로 큰 흔적을 남긴 사건이었어요. 동생은 자신의 커밍아웃으로 저 또한 무언가에서 꺼내주는 역할을 했다고 지금도 생각해요. 사실 커밍아웃할 때 동생과 나누었던 얘기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아요. 그러나 동생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 전의 저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확실해요. 그 후 동생이 가족들에게 커밍아웃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았어요. 가족이 많다 보니 쉬운 과정은 아니었어요.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에서 동생이 겪어야 했던 상처가 많아요. 그 과정을 함께하면서 마음이 무척 아팠어요.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고요. 동생의 여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여정을 함께하면서 저도 미처 알지 못했던 저를 마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어요.
세월호 참사는 지금도 뭘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기억이에요. 그 충격이나 슬픔은 제게는 아직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 상태 그대로 남아 있어요. 요즘도 참사가 일어났던 봄 무렵이 되면 제 마음 안에서는 여전히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세월호를 관통하는 이야기로 연결되고 말아요. 그래서 세월호에 대해서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는 것이 아직은 두렵고 힘든 일로 느껴져요. 얼마 전 이태원 참사도 실시간으로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상처 위에 또다시 상처가 덧나는 감정을 느꼈어요. 저는 사건 관계자도 피해자도 아니지만, 동시대에 세월호와 이태원을 지켜본 저에게까지 이 사건들은 차마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상처를 마음에 남기고 이 상처들은 치유되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 있다고 느껴요.
대학을 졸업하던 무렵에는 학내 성폭력이 큰 이슈였어요. 수면 아래 있던 수많은 폭력의 진실이 드러났고, 성폭력이 얼마나 만연해 있고 우리는 얼마나 여기에 무뎌져 있는지 경악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페미니즘 스터디를 하면서 좀 더 이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던 무렵 N번방 사건이 터졌어요. 저에게는 그 시기가 너무 두려웠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고, 또 이런 일이 해결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착취와 폭력의 피해자들과 연대하고 싶다고 느꼈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이 사건들도 잊혀 가지만 저는 지금 일어나는 혐오 범죄들이나 데이트 폭력, 스토킹 범죄는 모두 여성 혐오와 왜곡된 권력 구조에서 비롯된다고 느껴요. 이런 세상 안의 나는 어떤 조건에 처해 있는지 계속 인식하게 되는 이 상황들이 나의 존엄성을 툭툭 깎아낸다는 게 힘겨워요.
마음 안에는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가득하면서도 선뜻 용기 내어 말하기 어려웠던 레아 씨에게 노래는 자신을 담아내는 또 다른 언어가 되어 주었다. 미대에 진학하고도 음악을 계속했던 레아 씨는 싱어송라이터로 데뷔해 음반을 냈지만, 대중적인 음악을 하는 것이 자기 길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뭔가 얘기하고 싶은 것들이 있는데,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마음이 제 안에 늘 있었어요. 소심하고, 나도 나를 잘 모르겠는 이런 나를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지, 내가 느끼는 외로움이나 아픔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노래를 만들고 부르기 시작한 건 고등학생 때였어요. 그 무렵에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내적으로도 여유가 많아진 면도 있어요.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친구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를 썼어요. 그때 제가 처음으로 노래라고 할 만할 걸 쓴 게 있어요. ‘자장가’라는 노래인데, 그 노래는 너무 행복한 어느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서 오빠가 연습하던 피아노 방에서 쓴 노래예요.
미술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또 실제로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지만, 나를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음악이라는 생각을 해요. 제가 쓴 노래를 들려줄 때 행복하고, 사람들이 내 노래를 들어줄 때 기뻐요. 그런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알고 있기에 더 그래요.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내 노래를 들려주는 건 용기가 필요하잖아요. 이 노래가 어떻게 가닿을지 두려움을 내려놓는 순간 잠깐이지만 정말로 나 자신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껴요. 두려움을 내려놓고 나의 진심을 노래에 담아 전달하는 것, 너무 어렵지만,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일이기도 해요.
사실은 저는 지금도 상처받을 때면 숨고 싶고, 도망가고 싶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요. 작업실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숨어 있거나, 책에 파묻혀서 몇 시간이고 그냥 보내는 거죠. 그런 제가 노래를 하고, 이 노래를 사람들이 들어주는 건 너무 감사한 일이에요. 대학에 다닐 때 음악이 하고 싶어서 오디션을 보고, 어느 음반기획사에 들어가서 데뷔를 하게 됐어요. 그때 열심히 만들었던 콘텐츠를 보면 정말 많은 사람이 노력해 주었고, 저도 참 애썼구나 싶어요. 그렇지만, 대중적인 가수가 되긴 어려울 거라고 느껴 그만두었어요. 제 목소리를 찾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서른의 문턱에 선 레아 씨는 이제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레아 씨는 오래 만나 온 연인과 결혼했고, 지금의 일터로 자리를 옮겼다. 긴 시간 작업해 온 앨범도 올해는 세상과 만나 노래할 수 있고, 또 누군가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요즘 간절해진 건 아직 열매를 채 맺지 못하더라도 뿌리를 내리고 꾸준히 나만의 여정을 가고 싶다는 마음이에요. 저는 오랫동안 안전한 곳에 관한 갈망이 있었어요. 지금도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면 저는 그곳에 있는 게 너무 힘이 들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동안 제가 말없이 참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마다 도망쳐 온 것은 아닌지 그래서 내 의도와 다르게 또 다른 누군가를 힘들게 한 건 아닌지 돌아보게 돼요. 사실 일과 가정, 음악 이 모두가 제게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어요. 이제는 온전히 안전하지 않더라도, 내가 있기로 마음먹은 곳에서 튼튼하게 서서 아픈 일이 다시 온다고 해도 계속 성장해 가고 싶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로는 저는 청년들과 만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제가 머무는 시간과 공간이 젊은이들에게 안전하게 자기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곳이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요. 왜냐하면 저에게는 그런 순간이 너무 필요했거든요. 사실 청년들이 마음을 닫고 무관심해지는 것은 결국 마음의 상처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교회 안에서도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위계를 나누고 서로를 쉽게 판단할 때가 많잖아요. 저는 여전히 감당할 수 없는 상처들 앞에 서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기에 내가 뛰어들 만큼 용기가 있을까 두렵기도 해요. 그렇지만 상처받고 두려운 서로의 곁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잠시나마 찾아오는 청년들을 환대하려고 해요. 제가 받기를 바랐던 대로 어떤 조건도 없이 사랑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어떤 실수를 저질러도, 어떤 모습이어도 안아주려고 애쓰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