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생 베체 씨는 통번역대학원에 다니는 대학원생이다.
일산에서 태어난 베체 씨는 밝고 활달한 아이였다. 중학교 2학년 목동으로 이사한 베체 씨는 맏딸을 향한 부모님의 높은 기대에 양가감정을 느끼며 청소년기를 보낸다.
저희 아버지랑 어머니는 네 살 차이예요. 옛말에 네 살 차는 궁합도 안 본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 아빠를 보면서 와 두 사람은 어떻게 같이 살지?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중매로 만난 사이도 아니고 사내 연애 끝에 결혼한 경우였는데 저는 늘 그게 좀 신기했어요. 아빠는 직장에 다니고 엄마는 결혼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자녀들을 돌보는 그런 가정이었어요. 아빠는 가정적인 편이라기보다는 가장은 밖에서 열심히 일하고 자녀 교육은 엄마가 알아서 한다 그런 입장이었어요. 저희에게도 좀 엄격한 편이었고, 제가 느끼기에는 불필요하게 자존심이 강한 그런 부분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완전 화목하기만 한 그런 가족은 아니었죠. 저도 사춘기 무렵에는 부모님께 반항하기도 했었어요. 학교에서 저는 친구들이랑 되게 잘 어울리고 밝고 활달한 아이인데, 집에서는 말도 없고 밝지 않은 그런 아이였어요. 학교에서의 나와 집에서의 내가 좀 다른 사람 같은 그런 간극이 있었어요.
어렸을 때 저는 학교를 정말 재미있게 다닌 편이에요. 제게는 학교가 공부하러 가는 곳이라기보다 친구들이랑 놀기 위해 가는 곳이었어요. 학교생활이 어렵지 않고 오히려 너무 즐거웠던 거죠. 지금 돌아보면 저는 중학교 2학년 때가 제 인생에서 제일 빛난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성인이 되고 나서도 가끔은 밝고 활달했던 그때가 그립기도 했어요. 그러다 중학교 2학년 때 일산에서 목동으로 이사하게 되었어요.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아버지가 결단을 내렸던 거죠. 그게 저한테는 하나의 전환점이었어요. 이사 오면서 느낀 건 일산에서는 노는 친구들, 공부하는 친구들이 좀 나뉜 느낌이었다면 목동에서는 노는 친구들도 공부는 다 하더라고요. 쟤는 좀 노는 애 같은데도 공부를 되게 잘하고 그런 게 저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전학하면서부터는 외고 입시도 준비하고 남들 하는 건 다하면서 청소년기를 보냈어요.
저는 삼 남매의 첫째였기 때문에 저를 향한 부모님의 기대도 더 크다고 느꼈어요. 남동생과는 두 살 터울이고 여동생이랑은 여섯 살 차이여서 남동생과 삶의 궤적이 많이 겹친 편이죠. 그런데 성격은 반대였어요. 저는 활달하고 적극적인 편이었는데 남동생은 상대적으로 소심하고 숫기 없는 편이었어요. 아빠는 딸이라서, 아들이라서 이런 차별은 없었지만 내 자식들은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본인만의 기준이 강한 편이었어요. 엄마는 집안 좋은 시댁의 시집살이에 시달리면서 내심 제가 좋은 대학에 진학해서 보란 듯 성공하길 바라셨어요. 엄마가 이루지 못한 꿈을 제가 이뤄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부모님의 기대를 많이 받는 아이였는데, 한편으로는 그런 기대가 저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어요. 돌아보면 부모님과는 애증의 관계인 것 같아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지 않은 반항심도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님이 원하시는 바를 성취해내서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도 되게 강했어요. 부모님은 칭찬에 인색한 편이었지만 성과를 내면 보상을 주는 편이었거든요.
수험 생활 첫해 합격한 대학은 부모님에게도 베체 씨에게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재수 생활 끝에 더 나은 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지만, 스무 살 베체 씨는 신천지에 빠진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언어 과목을 좋아했어요. 영어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전학하고서부터는 제2외국어로 중국어를 배웠어요. 인문계는 보통 대학에 진학할 때 학교 이름을 보고 많이 가잖아요? 저도 그렇게 성적에 맞춰서 먼저 학교를 선택하고, 중국어 기초가 있으니까, 중어중문학과를 가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학과를 선택했어요. 그런데 사실 처음 가기로 한 학교가 좀 기대에 못 미치는 학교였어요. 일단 등록금을 내긴 했는데 보아하니 부모님도 내심 재수를 바라는 눈치였어요. 그래서 제가 먼저 말을 꺼냈더니 역시 아빠는 흔쾌히 다시 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등록금을 환불받고 수험 생활을 1년 더 하게 되었어요. 그때도 사실은 부모님을 기쁘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부모님이 내가 가게 된 학교를 별로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고 느꼈거든요. 결국 재수에 성공해서 이대에 가게 되었는데 이제는 어른들이 왜 이름있는 대학에 가라고 하는 건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그게 전부는 아닌데 그래도 무시할 수는 없는 거니까.
그때 재수하면서 알게 된 언니가 한 명 있어요. 언니는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삼수생이었어요. 교류할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단과 과목을 하나 같이 들으면서 점차 친해지게 되었어요. 제가 그 언니를 되게 좋아했어요. 사람이 참 괜찮고 좋더라고요. 그래서 잘 지내다가 제가 대학 붙었다는 걸 확인하고 12월쯤에 언니에게 연락했어요. 언니가 너무 잘 됐다고, 밥 한번 먹자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전도의 시작이었어요. 언니는 신천지였는데 저는 그걸 전혀 몰랐던 거죠. 3월에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새 학기가 시작되었는데 저는 그때 이미 포교를 당하는 중이었어요. 대학 생활과 신천지 생활이 함께 시작된 거죠. 20대 중반에 신천지에서 나오기 전까지 제 대학 시절 전부가 신천지에서 보낸 시간과 겹치니까 그게 참 아쉽게 느껴져요. 대학 생활 내내 시간과 에너지를 신천지 쪽에 너무 많이 쏟았거든요.
베체 씨는 질문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정답 같은 건 주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던 그에게 신천지는 명확한 답을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무렵 제게는 늘 마음 한편에 중학생 때 밝았던 제 모습과 자라버린 제 모습 사이의 괴리감이 있었어요. 점점 인간관계 안에서 상처받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면서 성격이 바뀌었는데 그런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죠. 나는 왜 이런지 고민도 되고 나를 좀 바꾸고 싶다는 열망도 컸고요. 그리고 저는 스스로에 관한 질문도 많고, 나를 알고 싶다는 마음이 되게 큰 사람이었어요. 사실 신천지로 저를 이끌었던 언니가 저한테 접근했던 방법도 심리 상담이었어요. 언니가 저한테 심리 상담받아 볼 생각이 있냐고 물어보았거든요. 저는 그때 마침 어떤 존재론적 고민이랄까 그런 게 컸고, 너무 좋다고 했죠.
막상 제가 왜 신천지에 이끌리게 되었던 걸까 돌아보면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딱 처음 떠오른 건 신천지에서는 명확한 답을 준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제가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한 것도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 쪽이다 보니까 명확한 답을 주는 분야가 아니잖아요. 저는 늘 궁금한 게 많은 사람인데 명쾌한 답은 없고 늘 혼란스럽고 약간 우왕좌왕하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런데 신천지에서는 흑백논리가 강하다 보니 명확한 답을 주는 듯 보였어요. 혼란스러웠던 것들이 명확해지는 것만 같고. 그런 지점에서 되게 매력을 느꼈어요. 특히 하느님에 대해서, 이 세상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성경 말씀에 대해서 공식처럼 떨어지게 가르쳐줬거든요.
모든 유사 종교가 마찬가지겠지만 두려움을 이용하는 부분도 있어요. 천주교에서는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 가운데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체험에 관해서 많이 나누잖아요. 그런데 신천지에서는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완전해지기 위해서 부족한 너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한다고 구체적인 조건들을 제시해요.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요. 무한 경쟁 사회에 단련된 사람들이 신천지 조직 안에서도 주입식 교육을 받고, 경쟁하며 자기를 증명하고 그런 체계를 익숙하게 느끼는 거죠. 사회에서 경험한 것과 비슷한 시스템 안에서 내가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동시에 사회가 주지 못했던 결핍을 채우는 느낌을 받기도 해요.
막상 신천지에서 나오고 난 지금 돌아보면 모순된 부분도 많아요. 그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야 한다고 가르치면서도 전도하면 안 되는 사람 목록이 따로 있어요. 그리고 늘 누가 몇 명을 전도했는지 실적을 따지고 수치화해요. 가족, 친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신천지라는 것을 숨기고 거짓말해야 하고, 종교통합을 외치면서 다른 종교 사람들에게 교묘하게 접근해서 신천지 교리를 배우게 만들어요. 그 안에서는 주입식 교육에 따라 사고가 통제되고, 배운 그대로 행동으로 바로 옮기고 이런 식이다 보니까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스스로 깨달아서 탈퇴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대학 입시만 바라보면서 비판적으로 사고하기를 포기하는 대한민국 주입식 교육의 폐해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만큼 그 구조가 비슷하거든요.
사실 신천지가 베체 씨가 만난 첫 번째 종교는 아니다. 삶과 죽음에 관한 질문이 많았던 베체 씨는 청소년기에 천주교 세례를 받았지만, 깊은 신앙생활을 체험하지는 못했다.
저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나는 어떤 사람인지에 관한 질문부터 시작해서 죽음에 관한 공포까지 생각이 많은 편이었어요.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지와 같은 삶과 죽음과 관련한 질문이 많았어요. 사람은 죽어서 어떻게 될까? 이런 식의 사후세계에 관한 궁금증도 깊었고요. 이런 질문은 가톨릭 세례를 받게 된 계기와도 연결돼요. 그 무렵 김수환 추기경님이 선종하시고 그분의 장례 미사를 텔레비전으로 시청했거든요. 그런데 만약 정말 그분이 이제 천국에 가는 것이라면 왜 사람들은 저렇게 울고 슬퍼할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오히려 장례식 분위기가 좋아야 하는 건 아닌가 싶었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저분은 어떤 삶을 사셨길래 이토록 많은 사람이 그를 위해 울어줄까 그런 궁금증도 있었고요. 이런 질문들이 또다시 저를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묻게 했고 천주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그런데 아빠는 종교를 별로 안 좋아하셨어요. 엄마가 시집살이하면서 너무 힘들고 하니까 성당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아빠는 그걸 되게 안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엄마는 아빠 몰래 눈치를 보면서 성당에 다닌 거죠. 사실 어렸을 때 저에게 신은 램프의 요정 지니 같은 존재로 여겨졌어요. 소원을 빌면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 그러다 엄마가 신앙생활을 하는 걸 보면서 믿음을 저렇게 갖는 건가 싶은 마음에 제가 먼저 엄마한테 성당을 다녀보고 싶다고 얘기하고 예비자 교리를 받게 되었어요. 아빠한테는 비밀이었고, 결국 세례도 아빠 몰래 받았어요. 워낙 안 좋아하셨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세례를 받고서도 성당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상황은 못 되었고 세례받은 성당에 정착하지도 못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제가 가톨릭 신앙에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리거나 본당 공동체에서 활동하거나 이런 경험은 부족한 편이에요. 주변에 신앙에 관해서 궁금한 걸 물어볼 사람도 딱히 없었고요.
베체 씨의 대학 시절은 그가 신천지에서 보낸 시간과 온전히 겹친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살았던 몇 년이지만, 정작 그곳을 떠나면서 밀려온 것은 그간 회피해 온 현실이었다.
대학 시절을 돌아보면 좀 짠한 것도 있어요. 나중에 저희 부모님도 제 얘기를 듣고 막 우셨어요. 그때는 오히려 잠시 멈춰서 주변을 돌아보거나 자신을 들여다보면 혼란스럽기만 하니까,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렸던 것 같아요. 신천지 안에서는 일종의 자기 계발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걸 성장으로 여기고 살았는데 정작 스스로와 마주하지는 못했어요. 거기서는 성경에 이렇게 쓰여있으니까 우리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이상적인 목표를 제시하고, 저는 거기에 나를 맞추려고 달려간 거죠. 있는 그대로 내 모습도 괜찮은데 그걸 흠이라고 여기고, 뜯어 고쳐보려고 애쓰다 보니 아주 힘들었어요. 그래서 제 대학 생활은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학교 생활하면서 신천지에서 시키는 것도 다 하느라 정말 바쁜 이중생활이었어요. 너무 피곤해서 쓰러져 자고 아침에는 못 일어나니까 학교도 늦게 가고, 집에서는 잠만 자고 다시 나가고 그런 생활을 몇 년 했어요.
신천지에 있으면서는 진로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하지 않았어요. 직업을 갖고 돈을 벌고, 결혼하고 이런 것들을 약간 세속적인 일들로 여기고 신천지에서의 영적인 삶, 활동들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세상에 두 발 딛고 살려면 직업도 필요하고, 미래에 관한 고민을 해야 하는 건데 어떻게 보면 사실 좀 회피한 거죠. 그래서 또래 친구들이 일반적으로 받는 그런 스트레스가 없었어요. 때로는 학교에서 만나는 재능있는 친구들 보면서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는 그들보다 더 명분 있고 높은 차원의 일을 하고 있다고 느끼기도 했어요. 정작 신천지를 탈퇴한 시기가 졸업하던 때랑 맞물리면서 현실적인 고민이 한꺼번에 닥쳐왔죠.
사실 저는 제 의사로 탈퇴한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제가 너무 바쁘고 비밀이 많으니까, 부모님이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건지 의심하고 계셨어요. 집에 오면 잠만 자고, 일어나자마자 어디를 가는데 어디 가는지는 얘기를 안 하니까. 그러다가 아빠가 자료를 보고, 제가 신천지에 빠졌다는 걸 알게 되셨어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좀 강제적으로 신천지 탈퇴를 위한 교육을 받게 되었어요. 그런데 저는 교육을 통해 빨리 신천지가 종교 사기라는 걸 깨달은 사례예요. 교육을 듣고도 그래도 나는 신천지에 남겠다고 하는 대책 없는 사람도 많거든요. 저도 신천지에 6년 정도 있으면서 제 모든 걸 쏟아부었는데, 그 시간은 제 인생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기간이니까 한순간 이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죠. 제 경우엔 자존심 다 버리고 그냥 제 생각만 했어요. 앞으로 나에게 남은 미래를 생각하고, 내 삶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라도 더 빨리 나오는 게 맞겠다고 생각하고 바로 결정을 내렸어요.
신천지 탈퇴 후 베체 씨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낸다. 보상받을 수 없는 청춘의 시간 끝에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벌판에 내버려진 것만 같은 막막함을 견뎌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탈퇴 후에 한동안 엄청 힘들었어요. 제가 그토록 피해 왔던 현실이 갑자기 닥친 느낌이었어요. 한편으로 저는 신천지에서 되게 많은 활동을 했었거든요. 신천지는 적재적소에 맞게 인재들을 잘 활용해요. 재능있는 사람들이 재능을 뽐낼 기회를 주는 거죠. 저는 거기서 영어 실력을 활용해서 외국인들을 대하는 일을 했는데 그때는 그게 굉장히 의미 있고 멋진 일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신천지에서 나온 이상 그건 어디 내밀 수 있는 스펙이 아니게 되었어요. 그리고 내가 이런 걸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싶은 부끄러움도 느끼고 있었어요. 저는 취업 면접을 보거나 자소서를 쓸 때도 신천지에서 제 경험을 솔직히 말하고 싶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이 경험이 제 인생을 구성하는 너무 큰 사건이어서 이걸 빼놓고는 저를 설명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부모님이 말렸어요. 그걸 왜 얘기하냐, 사회는 아직 그런 걸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셨죠. 저를 창피해한 건 아니지만 제가 상처받을까 봐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으면 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정작 제 경험을 쉬쉬했다면 회복이 더 더디었을 것 같아요.
신천지를 탈퇴하고 1~2년은 제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기였어요. 사실 신천지 탈퇴자들이 받는 상처가 있거든요. 신천지에서 받은 상처도 있지만 탈퇴자라는 이유로 받는 또 다른 상처들이 있어요. 저는 신천지에서의 몇 년을 부정하기보다 이 경험을 제 삶에 어떻게 통합시킬지 고민을 깊게 하면서 책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저한테 가장 영향을 준 책은 미로슬라브 볼프의 「기억의 종말」이라는 책이에요. 삶에서 일어난 폭력적인 사건을 신앙 안에 해석하고 회복하는 과정을 통해 상처를 삶으로 통합해 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어요. 사실 개신교 신학자가 쓴 책이다 보니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 가해자와 피해자가 연대를 이루는 것 이런 얘기도 나오고 약간은 거부감이 들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제게는 이런 과정을 통해 나도 언젠가 회복될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사실 정말 힘들었던 게 화를 낼 대상이 없다는 거였어요. 나는 누구에게 가서 따져야 하나 그런 분노.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스스로에게 화가 날 때도 많았고요. 어떤 탈퇴자들은 ‘청춘 반환 소송’이라는 걸 하기도 해요. 신천지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보상받으려는 노력인데요, 저는 그걸 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 세월은 어떻게 해도 보상받을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한편으로는 제가 피해자였지만 동시에 가해자였다는 죄책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에게 중요했던 것은 반환이나 보상이 아니라 치유였던 것 같아요.
신천지 탈퇴와 대학 졸업 후 한동안 베체 씨는 치유와 회복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어진 인연들을 통해 좀 더 깊게 가톨릭 신앙을 체험하며 청년 사목자로서 활동한다.
탈퇴 교육 후에도 한동안 명동성당에서 후속 교육도 듣고 그러다 예수회 마지스 청년센터와 인연이 닿아 아르바이트도 시작하고 청년 동반자 양성 과정도 수료했어요. 그 시간이 마냥 평온했던 건 아니에요. 내면에서 갈등이 많았어요. 가톨릭 신앙을 깊게 만나기 전에 처음으로 접한 신앙생활이 신천지였기 때문인지 제가 느끼기에는 좀 겹쳐 보이는 부분들이 있었어요. 아무래도 유사 종교가 유사 종교라고 불리는 이유가 기존의 종교에서 여러 부분을 차용하고 활용해서 운영하는 부분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떤 지점에서는 트라우마가 자극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다시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으면서, 이제 내 삶에는 종교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어요.
또 한편으로는 스스로에 대한 의문도 있었죠. 과연 네가 청년 사목자가 될 자격이 있냐는 그런 질문이 불쑥 들어왔고, 어떤 강한 믿음이나 신념에 대한 두려움이 컸어요. 왜냐하면 제가 깊게 신천지에 빠졌을 때 저는 제가 생각해도 좀 무서울 정도로 심취하고 몰입했었거든요. 이게 되게 양가적 감정이에요. 왠지 여기서도 내가 그런 나를 다시 마주하게 될까 두려우면서 동시에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신앙적인 질문이나 갈망도 여전히 있어서 하느님과 가까이 살아가는 삶에 끌리는 마음도 있었어요.
그렇게 고민하다가 예전부터 통번역을 전문적으로 해보고 싶다는 꿈이 있어서 대학원 진학 준비를 시작했어요. 대학원 결과가 발표 난 무렵이 사실 청년센터에서 정규직 전환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에요. 둘 다 놓치고 싶지 않지만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었는데 기도하면서 어떤 길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기도했어요. 대학원 결과가 발표 나기 전날 부모님과 스페인 여행 중이었는데 몬세라트의 검은 성모상 앞에서 그렇게 기도했었어요. 사실 대학원에 합격할 줄 정말 몰랐거든요. 그래서 합격 결과를 보고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는구나 생각했어요. 사실은 그게 고통의 길인 줄도 모르고. (웃음) 입학하고 학기 초에는 힘들어서 별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내가 벌을 받는 걸까?' 그런 생각도 했어요.
베체 씨는 세상으로부터 밀려난 사람들, 자신의 자리가 없는 이방인들에게 마음이 이끌리는 사람이다. 20대의 끝자락 이제 그는 더 큰 세상, 더 다양한 아픔을 향해 자신을 열고자 애쓰며 살고 있다.
제 마음을 뜨겁게 만드는 순간이 언제일까 생각해 보면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인 것 같아요. 특히 최근에는 이주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책을 읽으면서 제 안에서 뭔가 끓는 게 있었어요. 저는 사회에서 소수자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움직이고 그 사람들에게 시선이 머무는 사람인 것 같아요. 난민들의 얘기를 접할 때도 마찬가지고요. 한동안 ‘이방인’이라는 키워드에 깊게 머물렀어요. 아마 이런 끌림도 제 경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 같아요. 신천지를 탈퇴하고 한동안 제가 이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낙인찍힌 존재라고 느꼈거든요. 교회와 교회 아닌 곳 세상 사이의 경계에 선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래서 저는 밥벌이를 다른 일로 하더라도 세상에서 이방인으로 여겨지는 사람들과 만나는 일을 꼭 하고 싶어요. 제가 가진 것들을 활용해서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 나가고 싶다는 꿈이 있어요. 통번역대학원에 입학하면서도 나중에 난민들을 위한 사법 통역 같은 걸 주로 하고 싶다고 했었어요. 되돌아보니 그때는 이 길이 이렇게 어려울 줄 모르고 했던 말이네요. 아무래도 이런 일은 큰 수입이 없으니까, 본업으로는 국제회의 통역사로 일을 하고 꼭 따로 시간을 내서 이방인들, 주류에서 밀려난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과 함께하고 싶어요. 다만 인생이 제 계획대로 흘러가리라는 법은 없으니, 다양한 문을 열어두려고 해요.
사실 지난해 5월에 제 대학 친구 한 명이 자살했어요. 신천지 탈퇴 이후에 제 삶에 일어난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었어요. 이제 난 뭐 먹고 살아야 하지 고민하면서 당장 살아남는 것에 급급했던 데서 다시 삶과 죽음처럼 무거운 키워드가 시야에 들어오는 체험이었어요. 그 친구는 성소수자이기도 했어요. 저에게도 자신의 아픔을 나누었던 친구였는데 제가 그 친구를 충분히 돌보아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느꼈어요. 그러면서 세상에 존재하는 아픔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사실 제가 소수자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은 이유가 저부터가 편견과 선입견이 되게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도 있어요. 내가 모르는 더 큰 세상, 더 다양한 아픔을 만나고 이해하기 위해서 세상에서 밀려난 사람들과 직접 만나고 싶어요. 좁은 세상에 저를 가두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중이에요. 그렇게 발버둥 치는 피곤한 삶 그대로 그다지 나쁘지 않고 의미도 있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