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생 지은 씨는 평화방송 PD다.
지은 씨는 풍족하지는 않아도 부족함 없이 아이들을 보살피려 애쓰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현실적이고 책임감이 강한 어머니와 이상적이고 윤리적인 아버지의 모습은 지은 씨 남매의 가치관에 서로 다른 흔적을 남겼다.
저는 1990년 11월 2일, 위령의 날에 태어났어요. 고향은 경남 마산이에요. 지금은 창원이 됐죠. 창원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자랐고, 서울로 대학을 와서 20대부터는 서울에서 지냈어요. 부모님은 두 분 모두 62년생이에요. 두 분은 비슷한 점이 많아요. 나이도 같지만, 농촌에서 자라 청년기에 도시로 오게 된 공통점도 있고, 두 분 모두 6남매 가운데 막내였고,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다른 형제들에 비해 교육의 기회를 많이 누리지 못하고 일찍 어른이 되어야 했다고 해요.
두 분은 1989년에 마산에서 고모의 소개로 만나 3개월 만에 결혼하셨어요. 아빠가 엄마에게 첫눈에 반해서 적극적으로 구애하셨대요. 그리고 엄마는 딱 하나만 보셨대요. “세례를 받을 거냐, 안 받을 거냐?” 그래서 아빠가 세례를 받겠다고 약속하고 결혼하셨어요. 아빠는 약속을 지키셨어요. 혼인 교리를 받으면서 배우자의 신앙을 존중하고 아이들을 신자로 키우겠다고 했던 맹세가 아빠한테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두 분의 첫 만남으로부터 만 1년 만에 제가 태어났어요.
부모님을 보면 느낀 건 결혼 생활이 일종의 팀워크라는 거예요. 두 사람이 전략을 짜서 어느 방향으로 갈지 정해서 속도를 맞추며 같이 가는 거죠. 성격적인 면에서 두 분은 진짜 달라요. 엄마는 정말 성격이 급하고, 아빠는 항상 느긋해요. 두 사람은 만날 수가 없는 사람들인데, 어쩌다 보니 같이 살게 된 것 같아요, (웃음) 그래서 엄마가 뭔가를 결정하면 아빠가 거기까지 오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리고 그렇게 많이 싸우셨어요.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도 달랐는데, 엄마는 우리 가족이 잘 살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상황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아빠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해야 한다, 사회 구성원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게 있었어요. 저는 자연스럽게 그 가운데 나의 우선순위는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어요. 저는 기본적으로는 아빠를 많이 닮았어요. 남들보다 잘난 사람이 되기보다 모두와 잘 지내는 게 좋은 사람이거든요. 그래도 자신이 맡은 일을 제대로 하고 살아야 한다는 철저한 면은 엄마에게서 배웠어요.
부모님이 부지런히 일하면서 저희를 잘 키우려고 애쓰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는 부모님께 받을 건 다 받았다는 감사한 마음이 커요. 세 살 터울의 제 남동생은 좀 다르게 생각하는데 그 친구랑 저는 진짜 달라요. 일단 걔는 신은 없다고 생각하고요(웃음), 경제적인 면에 대한 걱정과 갈망이 무척 커요. 보란 듯 성공하는 것에 관한 욕심도 있고.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좀 답답할 때도 있어요. 삶의 가치관이나 세상을 보는 관점 자체가 서로 너무 다른 거죠. 부모님은 둘이 제발 반반 섞어 놨으면 좋겠다고 하세요.
지은 씨가 초등학생이었던 시절, 창원은 아이들이 골목을 뛰어놀며 자라고 이웃 간 경계가 없었던 90년대 말과 재건축으로 다양한 차원의 갈등이 시작되었던 2000년대 초를 통과했다.
제가 자란 창원은 지방에서는 꽤 규모가 큰 중소도시예요. 조금만 나가면 산도 있고 바다도 있는 되게 좋은 곳이에요. 어릴 때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자연을 많이 보고 자랐어요. 또 어린 시절에는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성당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성당과 놀이터를 오가며 자란 거죠. 자연스럽게 성당은 내 삶의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라고 여기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믿음이 주는 안정감이 좋다는 걸 알기 때문에 만약 아이를 기르게 되면 무조건 성당 옆으로 집을 구하겠다고 생각하곤 해요.
90년대 생들은 다 공감할 텐데, 그때 아이들은 서로 연락을 미리 하고 만나는 사이가 아니에요. 그냥 나가면 만나는 거예요. 놀이터에서, 문방구에서, 슈퍼 앞 오락기 앞에서 만나서 오후 내내 같이 노는 거죠. 마음껏 뛰놀며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다 배고프고 지쳐서 집에 돌아가던 그 시절의 낭만이 있었어요. 우리 동네는 남자애들, 여자애들이 다 같이 야구를 하곤 했어요. 어설픈 방망이와 테니스공으로 야구를 하는데 참 재밌었어요. 아직도 가끔 어린 시절을 보낸 아파트 단지의 모습이 꿈에 나올 때가 있어요.
그리고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아파트가 창원에서 처음으로 재건축을 하게 되었어요. 초등학교 6학년까지 살다가 집이 철거되는 것을 보면서 중학교에 진학했어요. 원래 있던 아파트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서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어른들이 어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무엇이 갈등을 일으키는지 지켜봤어요. 부모님이 그때 재건축 조합에서 일했기 때문에 어른들이 첨예하게 갈등하는 과정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어요. 그때 경제적 감각보다는 정치적 감각이 좀 생긴 것 같아요. 어디에 나가서 말하고 역할을 맡는 것의 책임감과 무게감을 느끼기도 했고요.
중고등학교 시절 지은 씨는 호기심이 많고 늘 긍정적인 학생이었다. 공부를 곧잘 하는 모범생이면서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상담사 역할까지 자처한 핵인싸이기도 했다.
저는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 일단 관심이 생기면 파고드는 걸 잘해요. 다행히 공부하는 건 좋아했어요. 교과서를 받으면 기뻐서, 바로 목차부터 펴고 “내년엔 도대체 뭘 배우는 거야?” 하는 애였어요. 청소년기에 저는 제가 생각해도 이런 딸을 낳고 싶을 정도로 모범생이면서도 건강한 아이였어요. 중학교 때는 클럽 활동으로 또래 상담 활동을 했는데 실제로 한 해에 상담을 100건 정도 할 정도로 열심히 했어요. 이런저런 고민을 듣다 보면 제 고민은 작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래서 그 무렵에 제가 엄마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그렇게 많이 했대요.
한편으로는 제가 가진 상황을 긍정하고 수용하는 면이 결이 다른 친구들에게는 재수 없게 느껴진다는 것도 이 시기에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수는 없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 있었어요. 너무 당연한 얘기인데 그때는 당연하지가 않았어요. “왜 나를 미워하지? 나를 왜 싫어하는지 알려줘, 그럼 어떻게 해볼게” 이런 거였죠. 사람들이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고, 나를 인정해 줬으면 좋겠다는 욕구가 굉장히 강했던 거예요.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걸 알게 되는 데 그때 받은 상처가 밑거름이 되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저는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오랫동안 의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고, 경찰을 꿈꾸기도 했어요. 내가 받아 온 좋은 것들을 남들에게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입시를 준비하면서는 경찰대학교나 간호사관학교 시험을 보기도 했어요. 운이 좋았던 게 저는 큰 시험에 강한 편이였어요. 실제로 살면서 제일 잘 친 시험이 수능이에요. 그 덕분에 성균관대학교 영상학과에 장학금을 받고 진학했어요. 고등학교 내내 영상부원으로 활동하며, 영상의 매력에 빠져 있었거든요.
10대 때 겪지 못한 사춘기는 20대 초반 뒤늦게 지은 씨를 찾아왔다. 착하고 공부 잘하는 자랑스러운 딸이었던 지은 씨는 깊은 슬럼프로 이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방황의 시간은 곧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성장의 시간이기도 했다.
대학에 오자마자 전공을 잘못 선택한 것 같다고 느꼈어요. 저보다 훨씬 영상을 좋아하고 이미 잘하고 있는 친구들이 너무 많았어요. 나는 그만큼 영화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내가 왜 여기 와 있지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또 다른 문제는 서울 생활이 너무 힘들었어요. 창원에서는 비슷비슷한 친구들이 같이 학교에 다닌 느낌이라면, 대학에서는 전국에서 모인 성향, 성별, 기질, 생각, 가치관이 다 다른 친구들이 막 섞이면서 여러 가지로 혼란을 겪었어요. 마침 그 무렵에 저희 부모님의 경제 사정이 잠시 어려워지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하고 경찰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는데 수험 생활이 길어지면서 많이 힘들었어요.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그 시절이 가장 힘든 시기였어요. 또 그 무렵에 부모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동안 속에 쌓여온 상처들이 불거지고 또 치유되는 시간을 겪기도 했어요. 늘 착하고 똑똑했던 딸을 향한 기대감으로 부모님이 했던 말들이 저에게는 부담이 되었고, 제가 잘 해나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모습이 짐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10대부터 조금씩 생겨났던 울분이 그 시기에 응축되어 분출된 거죠.
그렇게 휴학을 무려 5년을 했습니다. 그리고 복학이 아니라 정확히는 재입학을 했어요. 경찰은 제 길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시간이기도 했고 순탄한 길만 걷던 데서 잠시 벗어나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기도 했어요. 사실은 저도 사회적인 시선, 다른 사람의 이목이 중요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면도 있어요. 시험도 안 되고, 휴학 기간은 늘어나고, 그 사이 나이는 들고 그 상황 자체가 고통스러웠지만,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훈장이라는 압박감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요. 정석대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바심이 철저하게 깨지는 상황이 제게는 고통이자 기회였던 거죠.
지은 씨는 모든 게 너무 쉬웠던 10대와 달리 20대는 꽤 하드코어 했다고 말한다. 그만큼 그 시절 그가 겪어야 했던 고민의 시간은 길고 무거웠다. 그럼에도 바위처럼 단단했던 굳은 마음을 무너뜨린 건 다름 아닌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다행이었던 것은 사람들을 참 잘 만났어요. 힘겨운 20대를 보내면서도 신앙생활을 계속했거든요. 저는 20대 내내 청년 성서 모임을 했어요. 모임을 하고 연수를 다녀오면서 저한테 꼭 필요한 질문을 하게 된다고 느꼈어요. 누군가는 해주어야 하는데 아무도 하지 않았던 질문을 서로 나누고 스스로에게도 던지며, 그 답을 찾는 과정이 좋았어요. 꼭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더라도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주었던 것 같아요.
학교를 5년 쉬고 스물여섯이 되어 2학년 2학기로 재입학을 했어요. 그리고 그때 제가 젊은 꼰대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다섯 살, 여섯 살 후배들이랑 학교에 다니는 게 쉽지 않았고 생각보다 제가 되게 단호한 면이 많다는 것도 느꼈어요. 그런데 그때 같이 학생회를 했던 친구들, 동아리 후배들, 본당 언니 오빠 동생들이 저를 푹 삶아준 것 같아요. 바늘 하나 찔러도 안 들어갈 것처럼 딴딴한 면이 있었는데 좋은 침투력을 가진 친구들이 함께하면서 단단한 저를 많이 허물어 주었어요. 힘들었던 20대가 바위같던 저를 모래알로 만들어낸 느낌이에요.
다시 영상학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오래 고민했어요. 그런데 수험 생활을 하며 느낀 게 저는 영상을 좋아한다는 것이었어요. 또 시각이 좀 넓어진 것도 있어요. 꼭 영상을 만드는 사람이 될 필요도 없고, 영상과 관련된 일도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복학하고 제가 진심으로 영상을 좋아한다는 것을 다시 느꼈어요. 고민하고 찍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더 잘하고 싶은 마음도 갖게 되었고, 동료들과 동고동락하며 함께 작업하는 기쁨도 알게 되었어요. 그 덕분에 지금은 PD로 일하고 있어요.
지은 씨는 길었던 휴학과 대학원 과정을 포함해 대학에만 13년을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내 삶은 이 일을 위한 준비였을까 싶을 정도로 지은 씨에게 꼭 맞는 삶과 만나게 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아직 밖으로 나갈 상황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학교에서 조교로 일을 시작했어요. 직원으로 일하면서 시간을 번 거죠. 그런데 막상 학교에 있다 보니 “대학원 별거 아닌데?” 그런 생각이 들면서 대학원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부모님은 하고 싶으면 하는데 학비랑 생활비는 스스로 부담하는 조건으로 해보라고 하셨어요. 그게 쉽지 않죠. 그래서 대학원 다닐 때 교수님한테 자주 했던 얘기가 있어요. 꼭 드라마 대사 같은데, “교수님, 저 돈 필요해요”(웃음) 맨날 그랬어요.
그래서 대학원 생활은 정말 바빴어요. 공부하면서 조교로 일하고, 지원 사업도 굴리고, 학술지 간사까지 했어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는데 직장 생활하면서는 그 경험이 도움이 많이 돼요. PD로 일하면서 어떤 일이 닥쳐도 “못할 건 없지, 할 수 있어!”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평화방송은 대학원을 마칠 때쯤 입사하게 되었어요. 2022년 1월 1일이었는데, 대학원 생활에 많이 소진되고 지쳐있을 무렵이었어요. 그날도 연구실에서 밤을 꼬박 보내다 우연히 평화방송 홈페이지에 들어갔는데 모집 공고가 떠 있었고, 바로 지원했어요. 저는 언론고시를 따로 준비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 큰 기대는 없었어요. 그런데 서류심사와 필기시험을 통과하고 면접과 실무평가를 볼 때부터는 마음가짐이 좀 달라지더라고요.
3차 시험을 보러 갔는데 제가 생각해도 좀 신기했어요. 그동안 내가 여기에 오려고 이렇게 살아왔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회사랑 제가 잘 맞는 거예요. 신앙에 관한 질문, 업무에 관한 질문 모두 신기할 정도로 제가 고민해 왔던 부분과 겹쳤고, 그래서 대답을 잘할 수밖에 없었어요. 사실 저는 실무 경험이 많지 않았고, 지원자 중에 나이도 제일 많았기 때문에 불리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도 입사할 수 있었던 것은 미디어 사도로서 평화방송의 PD라는 역할을 제가 잘 이해하고 있었고, 정말 원했기 때문이라고 봐요. 지금도 저는 진짜 잘 맞는 일을 하게 됐다고 느껴요.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일까 고민하는 지은 씨에게 신앙은 길을 비추는 등대가 되어 주었다. 이제 지은 씨는 언제나 새로운 가지를 뻗는 늘 푸른 교회를 위해 자신이 겪어온 청춘의 시간과 그 과정에서의 고민을 다른 청년들과 나누고 싶다.
회사에 다니면서 제가 물려받은 신앙에 관한 감사함이 더 커졌어요. 올바른 믿음을 택해서 잘 살고 있구나 싶은 안도감도 있고요. 제 신앙의 롤 모델은 저희 엄마예요. 사람마다 엄마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장면이 있잖아요? 저는 저녁 기도를 하는 엄마의 뒷모습이에요. 촛불을 켜고 묵주 기도를 하는 엄마의 모습이 제게는 너무 자연스러웠고 저도 엄마가 되면 그렇게 살겠다고 생각했어요. 살아가면서 찾아오는 고통과 고민 앞에서도 신앙은 저에게 항상 단서를 주었던 것 같아요.
저는 항상 어떻게 제대로 살아갈 것인가에 관한 고민이 많아요. 그래서 예수살이 공동체의 배동 교육을 받았을 때 큰 매력을 느꼈어요. “소유로부터의 자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기쁨, 아름다운 세상을 위한 투신”, 제가 고민하던 삶에 대한 단서가 이렇게 찰떡같이 정리되어 있다니 반가운 마음이었죠. 저에게 너무 필요한 말이면서, 이렇게 내 삶의 지향을 정의할 말이 필요해서 나는 이곳을 찾아오게 되었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지금은 본당 활동뿐만 아니라 예수살이 공동체 활동도 함께하고 있어요.
저는 교회야말로 늘 푸른 올리브 가지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선 예수님 당신이야말로 청년이셨고요. 그래서 교회가 늙어간다는 건 이상한 말 같다고 느껴요. 교회의 본질 자체가 푸르름을 향하고 있다고 믿거든요. 고리타분하고 비본질적인 관행에 매달리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이 그러하셨듯 본질을 보고, 두려움 없이 새 가지를 뻗어가는 가장 싱싱하고 푸른 나무가 교회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교회를 이루는 모두가 예수님은 어떤 얘기를 하셨고, 지금 여기에서 그 얘기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 함께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고 믿어요.
저는 교회 안의 청년들이 좀 더 활동적이었으면 좋겠어요. 신앙생활이 제대로 알고 제대로 살며 복음을 드러내 보이는 과정이라고 할 때 오늘날의 세상에서 우리가 선포해야 할 진리는 무엇이며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좀 더 적극적으로 고민해 보자고 초대하고 싶어요. 저는 언젠가는 이런 주제로 강의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요. 젊은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제가 정답을 제시할 수는 없겠지만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제 경험을 나누어 줄 수는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런 나눔이 지쳐있는 청년들에게 작은 활기가 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