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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따르지 않으면서 전통을 잇는 (2023년 봄)

1995년생 찬희 씨는 장례지도사다. 20대 끝자락, 요즘 찬희 씨는 믿음 깊은 가정에서 길러온 성소에 관한 열망과 새로운 장례 문화에 관한 고민 그리고 성소수자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계속돼 온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는 여정을 통합하는 길을 찾고 있다.
찬희 씨는 신앙심이 깊은 부모님 아래 네 남매의 둘째로 자랐다.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다복한 가정이었다.
저는 95년생이고, 대전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아빠는 충청도 강경 사람인데 대전으로 유학을 와서 캠퍼스 커플로 엄마를 만났고 결혼까지 하셨어요. 아버지 쪽은 3대째 신앙생활을 이어온 기독교 집안이었어요. 물려받은 신앙인만큼 신앙생활도 습관처럼 하기 쉬운데 아버지는 믿음과 종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분이셨던 것 같아요. 개신교 집안에서 자라 늘 교회를 다녔지만, 성당도 가보고 절에도 부러 찾아가 보셨다고 해요.
어머니는 본래는 신앙이 없었지만, 큰 오빠가 먼저 세례를 받고 나서 따라서 기독교 신자가 된 경우예요. 어머니의 큰 오빠, 저에게는 큰 외삼촌이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그 경험이 어머니의 신앙에 영향을 주었던 것 같아요. 일찍 세상을 떠난 오빠를 통해 신앙을 받아들였고 그래서였는지 어머니의 믿음은 굉장히 열정적이었어요. 어려서부터 엄마가 저에게 항상 “너의 하나님을 찾아라” 그런 얘기를 한 기억이 나요. 또 아주 어린 시절부터 엄마를 따라 새벽 기도를 다닌 기억도 있어요.
형제 관계는 저랑 두 살 차이 나는 형이 한 명 있고, 제 아래로 한 살 차이 나는 남동생이 있고, 그 아래로 이제 중학교에 입학하는 막둥이 여동생이 있어요. 저희 또래에선 형제가 많은 편이었죠. 가족 분위기는 다른 가족들 얘기를 들어보면 우리 가족은 화목한 편이었다고 느껴요. 서로 전화도 자주 하는 편이고. 아빠도 엄마도 각자 친가 외가 모두와 자주 연락하고 서로 같이 어울리는 편이거든요. 그런 모습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우리도 자연스럽게 사이좋게 지냈던 것 같아요.
저희 부모님은 공부를 잘해야 한다던가, 입시에서 성공해야 한다던가 그런 압박은 전혀 주지 않으셨어요. 아빠는 사업을 하셨는데 지금은 사정이 좋아졌지만 제가 어린 시절에는 집에 차압 딱지가 붙고 이럴 정도로 어렵기도 했어요. 그래서 아빠는 본인도 마흔 살부터야 돈을 벌기 시작했다고 그러니까 지금부터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세요. 지금도 만약 공부를 더 하고 싶다면 더 해라, 우리 집에서 한 명쯤은 공부를 계속 시켜줄 수 있다고 얘기하세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말씀만으로 너무 감사하죠.
자라면서 찬희 씨는 다양한 교회 전통을 경험했다. 가정교회를 시작할 만큼 신앙에 진지했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찬희 씨는 기독교 대안학교에 진학한다. 그러나 청소년기 시작된 성 정체성에 관한 고민과 학교의 보수적인 신앙 교육 사이에서 찬희 씨는 마음 안에 이는 여러 파동을 느낀다.
아빠와 엄마가 모두 신앙에 관해 고민을 많이 하는 분들이었기 때문에, 서너 가정이 모여 가정교회를 만들고 예배를 함께 드리기도 했어요. 또 제가 고등학교 진학을 고민하던 무렵 아빠가 추천해 주셔서 저는 고등학교도 기독교 대안학교를 나왔어요. 그런데 사실 개신교계 대안학교가 굉장히 보수적인 곳이 많아요. 창조 과학 특강 같은 것도 함께 듣고. 그런 환경에 있다 보면, 사람이 굉장히 열정에 넘치게 되거든요. 나도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저도 그런 분위기에 영향을 받기도 했어요.
그런데 저는 중학생 때부터 스스로의 성적 지향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런 고민이 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느꼈는데, 막상 학교에서는 그건 안 된다고 가르쳤으니까 신앙 안에서 이중적인 사고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냥 나는 이대로, 나대로 살면 안 되는 것일까 그런 고민도 있었고, 나의 성적 지향은 내가 짊어진 십자가일까 그런 생각도 했어요. 이런 마음 안의 부대낌이 제 신앙, 제 교회를 찾아 나서는 과정에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자신의 신앙과 자신의 교회를 형성해 나가는 가족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에 내 정체성과 교회의 가르침이 맞지 않을 때, 아예 신앙을 외면하기보다는 나의 정체성과 믿음을 통합할 수 있는 교회를 찾아가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다른 친구들처럼 진로 문제, 먹고사는 문제 그런 고민도 있었지만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고민은 제 신앙과 삶의 가치관을 세워나가는 과정이었어요. 종교학을 공부하기도 했고 다른 종교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와 비교할 때 조금 특별한 점이 있다면,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하잖아요? 저는 인류가 번성하고 진화해 온 과정에 사랑이 없었다면 인간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사랑을 믿는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찬희 씨는 심리학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한다. 가톨릭계 대학으로 진학한 찬희 씨는 진로에 대해서도, 신앙에 대해서도 다양한 길을 살피며 고민을 계속한다.
대학은 심리학과로 진학했어요. 어렸을 때 저희 형제들이 놀이치료를 받았던 경험이 있거든요. 당시에 그게 멋지다고 생각해서 심리학과를 선택했는데, 재밌지만 직업으로 삼고 싶진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방학 때 요리학원을 등록해서 한식 요리를 배워보기도 하고, 의류학과 수업을 들으면서 패션 디자인을 배워보기도 했어요. 그런데 막상 배워보니 음식은 사 먹는 게, 옷은 사 입는 게 낫겠더라고요. (웃음) 마지막으로 휴학하고 메이크업을 배워서 7~8개월 정도 일했는데 그건 적성에 잘 맞았어요. 그런데 메이크업을 업으로 삼는 것을 저희 부모님이 많이 반대하셨어요. 저희 형제 중에 저만은 공부를 계속하길 바라셨거든요. 그래서 그 길을 포기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던 시절에 종교학 수업을 듣게 되었어요. 그리고 한동안 종교학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기도 했고요. 열심히 진로를 찾았다고도 할 수 있는데 어떻게 보면 되는대로 살던 시절이기도 했어요.
동아리 활동으로는 IVF(한국기독학생회)라는 개신교 복음주의 학생단체에서 활동했어요. 사실 더 유명한 개신교 동아리들이 많았는데, 그런 곳은 너무 보수적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일부러 조금 더 열린 분위기를 찾아갔던 것 같아요. 저는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면서 너무 보수적인 신앙관에 대해서 좀 회의적인 태도를 지니게 되었어요. 고등학생 때 저를 돌아보면 스스로를 너무 작은 틀 안에 가두고 살면서 끊임없이 죄의식을 느끼는 과정이 있었어요. 그런데 조금씩 나이도 들고, 생각도 성숙하면서 내가 원래 알고 있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큰 문제가 아니구나, 죄가 아니구나 생각하게 되었던 거죠.
그렇게 대학 시절에 IVF 활동을 2년 정도 했는데, 개신교 동아리 문화는 굉장히 돈독한 분위기예요. 그런데 저는 원래 성격도 그렇고, 자라면서 계속 틀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이 있었던 사람이니까 그 돈독함이 일종의 억압처럼 느껴졌어요. 같이 공동체 예배를 드리고 나서도 각자 집에 가면 되는데 꼭 다 같이 모여서 가야 하고 그런 게 저는 너무 싫었어요. 그런 항상 함께해야만 한다는 분위기가 저를 억압한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저에게 대학 생활은 그때까지와는 다른 생각들, 다른 가치관들도 알게 되면서 그동안의 틀을 깨고, 자기 세계를 넓히는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개신교 신자로 나고 자란 찬희 씨는 군대에서 가톨릭 세례를 받는다. 새롭게 경험한 가톨릭교회의 전례는 감동을 주었지만, 긴 시간이 흐르지 않아 공동체 안의 수직적인 문화와 성 윤리에 관한 경직된 가르침이 찬희 씨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가톨릭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가톨릭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어요. 입대하고 훈련소에 갔는데 원래 예비자 교리 과정이 적어도 6개월은 되잖아요? 그런데 훈련소에서는 3주만 나오면 세례를 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건 진짜 개꿀이다!”라고 생각하고, 후딱 가톨릭 세례를 받았어요. 자대 배치를 받고 한동안은 아무래도 익숙한 개신교회에 나가다가 교회와 군대가 분리되지 않는 경직된 분위기가 싫어서 성당에 다니게 되었는데 그곳에 계신 수녀님이 참 좋은 분이었어요. 수녀님을 통해 가톨릭교회 전통들에 대해 많이 배웠고, 그런 것을 하나하나 따라 하면서 느끼는 것들도 많고 참 좋았어요.
그렇게 레지오 마리애 활동도 시작하고 군 간부 자녀들이 다니는 성당에서 교리 교사도 맡고 너무 기쁜 마음으로 성당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뭐랄까 어느 순간 좀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제가 너무 좋아하고, 덕분에 가톨릭교회에 대해서 배울 수 있게 해주셨던 수녀님이 신부님만 오면 너무 직장 상사 대하듯 하시는 거예요. 책상에 앉아 있다가도 신부님만 오시면 일어서 인사하고, 자리를 비켜 드리고, 항상 두 손을 모으고 깍듯이 대하고 그런 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걸 보면서 “아니 이게 무슨 일일까!” 고민했어요.
또 그때 수녀님이 저한테 주신 책이 ‘YOUCAT(유캣) 가톨릭 청년 교리서’였어요. 저는 성소수자나 임신 중단, 여성 사제 직분 등 성과 종교의 문제가 교차하는 지점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 책에는 그런 논의들이 사실상 없거나 깊이 있게 다뤄지지 않았어요. 또 이런 주제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입장이, 가르치는 대로 배우고 따라야 한다는 것인데, 궁금한 것들에 관해 물어볼 수는 있지만 성당에서는 그냥 전통적인 관점에서 정해진 얘기만 하시니까 그 가르침을 아무리 들어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어요. 저는 이미 개신교회를 떠나온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건 아닌 것 같아”라고 생각했을 때 가톨릭교회를 떠나는 데도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한동안은 나랑 그리스도교가 안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불교도 기웃거려보고 했어요. 그러다 성공회라는 교단을 알게 되면서 지금은 성공회에서 견진 성사도 받고 성공회 성당에 출석하고 있어요. 물론 성공회가 진취적인 교단으로 알려져 있어서 간 것도 있는데, 막상 교회 안의 분위기는 보수적인 부분도 있고 특히 정치 사회적 입장은 신자들 사이에서도 굉장히 다양해요. 하지만 제가 그리스도교 안에서 계속 부대꼈고 고민했던 부분들을 열린 태도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위기가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많은 성소수자들이 교회를 떠난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교회에서 사랑을 느끼고 나누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찬희 씨는 교회를 떠나고 싶었던 적은 없다고 말한다. 어떤 교회도 완벽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는 다름을 인정하며 하나를 향하는 성찬에서 희망을 본다.
저는 대학원에 진학해서 종교와 섹슈얼리티 문제를 공부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조금 도전적인 질문이지만, 성당에서 “왜 딜도는 축복하지 않을까?” 고민했거든요. 성에 관해 터부시하는 그리스도교 문화에 문제를 느꼈고, 섹슈얼리티를 좀 더 편하게 얘기할 때 우리가 진짜 나다움을 찾고, 다른 사람도 존중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어요. 예수님 말씀 가운데 “내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저에게는 일단 자기 몸부터 아끼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도 들렸거든요. 자기의 몸을 아끼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성적인 부분을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이런 부분을 파고 들어가는 게 하나의 목표였어요.
저는 교회를 떠나고 싶었던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만약 떠나고 싶었다면 진작 떠났을 것 같아요. 성공회는 대외적으로 진보적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진보적인 사람들이 모여도 서로의 진보성에는 차이가 크잖아요. 얘기하다 보면 서로가 괜찮다고 느끼는 지점이 다른 거죠. 성소수자에 관해서도 성소수자 성직 서품, 동성혼, 동성 부부의 입양 등에 관해서 각각 생각이 비슷한 줄 알았던 사람들이 서로 다르다는 걸 알았을 때 오히려 더 당황스러운 것 같아요.
성찬식 때 성공회에서 쓰는 문구가 있어요. 제가 전례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인데요, 성찬을 나누며 “우리는 서로 다르나 한 빵을 나누며 한 몸을 이룹니다”라고 함께 말해요. 온 신자가 다 같이 말하는데 저는 그게 굉장히 ‘성공회스러운’ 가치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서로 정말 다르고 생각도 달라요. 물론 가끔 속으로는 ‘시바시바’ 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표현하고 자기 가치관을 솔직하게 나누면서 하나 됨을 향하는 것, 그것이 가장 ‘성공회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회도 신자들이 고령화되고, 새로운 신자가 줄어드는 고민이 있지만 저는 제 스스로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하나를 향하는 이 가치를 계속 이어가고 싶은 소망이 있으니까,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이 가치는 계속될 것이라고 믿어요. 그래서 신자 수가 줄어서 성당이 문을 닫고 그런 상황이 된다고 해도 그 사실 자체로 그렇게 슬플 것 같지는 않아요.
지금 찬희 씨는 장례지도사로 일한다. 젊은 나이에 스스로 세상을 떠나는 성소수자들의 부고가 계기가 되었다. 이제 찬희 씨는 전통적인 장례 문화가 더는 담아내기 어려운 추모와 애도 그리고 위로의 장례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대학 다닐 때 성소수자 동아리에서 활동했어요. 군 전역하고 학교로 돌아와서 동아리 친구들이랑 얘기를 나누면서 “누구누구는 잘 지내?” 이렇게 근황을 나누는데, 한 친구가 그 사이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어요. 그 친구와는 두세 번 술자리에서 본 것이 다여서 그렇게 깊은 인연이 아니었지만, 마음이 무거웠죠. 그 친구는 가톨릭 신자였다고 해요. 그런데 성당에서 자살한 사람은 장례 미사를 치를 수 없다고 해서 장례식을 성당에서 할 수 없었다는 얘기를 듣고 의문이 들었어요. 왜 그 친구를 그렇게 보내야 하는 걸까? 그리고 2,3년 전부터 변희수 하사를 비롯한 많은 성소수자가 떠나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요. 주변에서도 건너 건너 알고 지내던 성소수자들이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경우를 종종 듣게 돼요. 그럴 때마다 그분들을 추모하고, 남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장례에 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장례식장에서 장례지도사로 일하고 있어요. 아직 두 달 정도 일했고 더 배워가는 중이지만 빈소를 유족들과 함께 지키다 보면 여러 고민이 들어요. 가족들이 3일 동안 빈소를 지키는 게 쉽지 않을 일이에요. 그리고 막상 그렇게 지내면서도 고인을 보내며 정작 가족들끼리 감정을 나누는 시간은 거의 없어요. 돈 문제 같은 되게 현실적인 얘기들만 서로 주고받는 거죠. 요즘은 밤에는 빈소를 닫고 집에 갔다가 아침에 다시 오는 경우도 많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미디어에 그려진 서구적인 장례 문화를 생각했어요. 고인에 관한 추모나 고인을 떠나보내는 가족들의 위로에 좀 더 초점을 두는 장례식을 우리가 할 수 있으면 어떨까 그런 고민을 하게 돼서 요즘에는 내가 해외에 나가서 그런 것을 배워볼까 그런 고민도 하고 있어요.
또 한편으로는 저는 어려서부터 목회자나 사목자가 되는 길에 대해서도 계속 고민을 해왔어요.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니며, 저도 언젠가 커서 내가 교회 안에서 받았던 사랑을 주변에 나눠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도 항상 주일학교 봉사를 꾸준히 했던 것 같고요. 성공회로 와서도 성직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었는데, 지금은 성공회 종신 부제가 되는 길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개신교 배경에서 자랐던 찬희 씨는 가톨릭교회에서 전통적 전례를 배우고 행한 경험이 특별했다고 말한다. 나의 하느님을 찾기 위한 여정 끝에 찬희 씨는 전통을 그저 따를 수는 없으면서도 전통을 사랑하는, 전통의 형태를 거부하면서도 전통의 마음을 잇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 참석하는 성공회 전례는 굉장히 고교회주의예요. 오히려 전례는 가톨릭보다 훨씬 그래요. 그래서인지 성공회 신자들도 가치관은 진보적이어도 전례적으로는 전통적인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요. 저도 전통적인 전례가 주는 힘과 아름다움을 많이 느껴요. 사실 저는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갔을 때 전례가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가치관이 너무 안 맞아서 고민하던 중에 성공회를 찾았던 거고 지금도 전통적인 전례가 주는 감동을 항상 느껴요.
제가 지금 낀 묵주 반지가 성공회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성물방에서 산 것인데 보통 신부님을 찾아가 축성 받잖아요. 그런데 저는 왠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제 성격이 그런가 봐요. 기도할 때 사용할 반지를 그냥 아무 신부님에게 찾아가서 청하기보다 나를 진짜 생각해 주는 사람에게 축복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교리서를 찾아봤더니 축성이랑 축복은 달라서 축복은 성직자가 아닌 사람도 부모들이 자녀에게 기도해 주듯 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같이 종교학 수업을 듣던 수녀님께 반지 축복을 부탁드렸죠. 수녀님이 당황하셨지만 감사하게도 제 손을 잡고 같이 기도해 주셨어요. 그래서 이 반지로 기도할 때면 항상 그 수녀님 생각이 나요.
사실 많은 사람이 하는 대로, 시키는 대로 살면 편하긴 하겠지만 일단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기도 하고, 전통적인 형태를 따르지 않더라도 전통적인 가치를 따라 살 수 있다고 믿는 편이에요. 묵주 반지로 기도하고 축복받고 싶은 마음도 있으면서, 또 신부님께 축성 받는 전통을 그저 따르고 싶지는 않은 게 저라는 사람 같아요. 완전히 전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전통이 가진 본질적인 힘과 아름다움을 알고 지키고 싶은 마음. 거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전통을 지킨다는 것에서도 형식보다 마음이 전해지는 게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