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 신부의 삶과 도시 그리고 빈민-
2020년 인권연대 10주년 기념 세미나
박문수 신부 생애구술사 프로젝트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는 센터 설립 10주년을 맞이하며, 초대 소장 박문수 신부님의 생애를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하였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한국교회 빈민사목의 지평을 기록하는 동시에 예수회 한국관구 사회사도직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을 목표했습니다. 더불어 올해는 1941년 11월 태어난 박문수 신부님의 팔순이자, 1960년 8월 위스콘신 관구에 입회한 신부님의 입회 60주년이기도 합니다. 인권연대 설립 10주년을 기념하는 방법으로 박문수 신부님의 생애를 돌아보고, 특히 신부님께서 한국에서 보낸 50년에 관한 회고를 남기고자 하였습니다.
박문수 신부님의 구술은 2020년 7월부터 9월에 걸쳐 총 8차례 진행되었습니다. 주 면담자로서 저는 구술자인 박문수 신부님과 매주 금요일 오후 서강대학교 이사장실 또는 인권연대 사무실에서 만났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예수회 홍보국과 예수회 아카이브실과 협력하였습니다. 홍보국 정다운 선생님은 영상 기록을 맡았고, 아카이브실장 김정욱 신부님은 부 면담자로 면담에 동반해주었습니다. 바쁘신 중에 프로젝트에 함께해주신 두 분께 특별한 감사를 전합니다.
회차별 약 2시간 분량으로 진행된 면담은 면담 내용을 문서화 한 녹취록과 음성 녹음 파일, 영상 녹화 파일로 기록해 보관하고 있습니다. 오늘 나눠드린 ‘박문수, 80년의 기록’ 소책자는 신부님의 구술을 맥락을 다듬어 정리한 것입니다. 가능한 신부님의 표현을 그대로 살리고, 의도한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삶과 활동에 관해서는 역시 이 기록을 읽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신부님의 목소리로 남긴 당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팔순을 앞둔 할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지는 당신보다 꼭 50살이 어린 젊은이로서, 입회 60년을 맞이한 원로 예수회원을 마주한 새내기 평신도 협력자로서, 여전히 푸른 눈이 형형하나 이미 50년 세월을 한국에서 보낸 선교사의 삶이 경이롭기만 한, 한국에서 나고 자란 서른 살 청년으로서 저는 제가 바라본 신부님과 그분의 정신을 나누고자 합니다.
에피소드로 엿본 박문수 신부의 연대기적 삶
We Should be a American. We are fully American.
우리 세대부터는 민족 언어를 배우지 않았어요. 나중에는 그것 후회했지만. 그때는 미국 안에서 출신 민족 개념 무너지는 중이었어요. 좀 더 좋은 생활, 더 나은 기회를 찾아서 민족 공동체가 흩어지기 시작하는 시기였어요. 또 우리 세대는 “우리는 미국 사람이 되어야 한다(We should be a American).” 그런 의식 아주 강했어요. 우리 전 세대까지 천주교는 “완전한 미국 사람 아니다(Not quite American).”라는 문화 있었지만, 케네디 대통령 이후에 그런 의식 무너졌고, 우리도 그것을 원했어요.
Simple
고등학교 시절은 나에게 혼란스러운 감정을 주기도 했어요. 제가 자란 문화와 그들의 문화가 달랐어요. 그들은 좀 더 좋은 것을 갖고 있었어요. 장난감이나 자전거 그런 것. 담배도 피우고 습관이 달라요. 그래서 그 차이를 많이 느꼈어요. 나는 좀 이상한 사람이다. 촌뜨기 같은. 그때 아이들이 하는 말로 “심플(Simple)”이라고 해요. 새로운 문화를 잘 모르고, 뒤처진. 그 말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어요. 노력해서 그들과 비슷하게 되려고 해보았지만 잘 안됐어요. 돌아보면 그때 나는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자신 외의 어떤 모습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었어요. 그 혼란은 고등학교 시절 내내 극복되지 못했어요. 자기 자신을 모르는 것도 예수회 입회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Maybe you will be a Jesuit.
그 시기는 천주교가 많이 변화하는 때였죠. 가장 큰 변화는 케네디 대통령의 등장이었어요. 그는 특히 천주교 신자들에게, 젊은이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어요. 그리고 교황 요한 23세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열고, 교회 개혁을 말하기 시작했죠. 우리끼리도 그런 얘기를 나누었어요. “아 이제 가톨릭교회 많이 달라질 것이다.” 그때 우리는 “교회와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다” 그런 희망을 지니고 있었어요. 수도자로서 세상을 위해 살겠다는 마음 품게 되자 내 생활이 갑자기 빨리 변했어. 기도, 미사 더 의미있게 되었어요. 그 후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어머니가 “아마 너는 예수회원이 될거다(Maybe you will be a Jesuit).”라고 말해서, 간접적으로 어머니의 뜻을 알게 되었어요.
기울어지지 않는
60명 수련자 중에 내가 비들이었어요. 그 이유는 거의 모든 수련자가 위스콘신 관구가 운영하는 마켓 고등학교 또는 크레이튼 고등학교 출신이었어요. 90퍼센트 정도. 하지만 나는 완전히 다른 곳에서 왔기 때문에 그 일을 맡게 되었어요. 내가 비들이 된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게 일하면서 수련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어요. 나는 애니어그램 1번이에요. 그래서 수련원에서는 일정표 꼭 따라야 한다, 규칙을 지켜야 한다, 집중해야 한다 그런 면이 강했어요. 특히 수련원에서 내가 가진 성격의 그런 면 많이 나왔기 때문에 나중에는 거기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어요. 농담하고, 속된 말도 하고, 규칙을 벗어나 보기도 하는 그런 면들을 보이려고 하기도 했죠.
선배들에 대한 실망과 예수님의 위로
그 시기에 힘겨운 일은 시간이 흐를수록 선배들에 대해 실망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그때 미국은 인종차별 있고,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선배 신부님들 가운데 부자처럼 사는 사람 너무 많이 있었고, 인종차별에 대해서 그것은 나의 문제 아니다, 그냥 놔두는 그런 것을 보는 게 힘들었어요. 내가 느낀 실망, 우리 동창들도 비슷하게 느꼈어요. 그렇게 힘들 때마다 내가 예수님의 동반자라는 것 기도 안에서 확인하고, 위로받으면서 보냈어요.
불일치와 오해 사이에서
제일 어려운 것은 한국 회원과 미국 회원 간의 불일치였어요. 한국에 오기 전에는 그 갈등이 심한 것을 몰랐어요. 사실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미국인 선배 한 사람이 어떤 한국 회원에 대해 말하면서 “나는 그 사람이 싫다(I hate that man).”라고 얘기했고 나에게 그것 충격이었어요. 예수회 안에서 그런 말을 처음 들었거든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도 “헤이트(Hate)”라는 말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어요. 나는 그런 불일치 앞에 내가 미국인으로 소속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 싸움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어요. 함께 입회했던 한국인 동기 세 명은 모두 예수회를 떠났어요. 여러 이유 있겠지만, 아마 미국 회원과 한국 회원 간에 불일치와 오해가 많이 있었고, 그들이 많이 실망한 것도 하나의 이유예요.
순교성지에서 홀로 받은 사제품
나는 미국에서 철학 공부했고, 신학도 1년 공부했기 때문에 4학년으로 들어갔어요. 73년도에 동창들과 명동성당에서 부제품을 받았어요. 그 후에 부제로서 실습도 갔습니다. 나는 마지막 학기는 세인트루이스에서 마치고자 했어요. 그래서 미리 한국에서 사제품을 받고자 했는데 예수회에서 허락했고, 김수환 추기경님도 허락해주셨어요. 그래서 저 한 사람을 위해서 김수환 추기경님이 사제 서품을 주셨어요. 절두산 순교성지 성당에서 사제서품 미사가 있었는데 추기경님이 그때 박정희가 독재를 준비하고 있는데, 지금 우리나라 상황을 볼 때 순교자 더 필요할 것 같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다행히 사제들이 순교하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후 실제로 여러 사제가 잡혀가고, 고문당했죠.
사회학 공부를 결심하다
같이 학교에 다닌 교구 신학생 중에는 관심을 지닌 사람이 없었어요. 그들은 뭐라고 할까, 온실. 온실 안에 키워지는 그런 분위기였는데 그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너무 관심을 가지면 의심받게 돼요. 성소가 있나, 사제가 될 수 있는 사람이냐. 그런 분위기였어요. 내가 73년도에 사제서품을 받았는데 그때는 긴급조치가 나오고 독재가 시작하는 시기였어요. 나는 그런 모습을 목격하면서 학교 밖에서는 사회 운동이 계속되는데, 실험실 안에서 연구하고 이런 것을 내가 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전공을 바꿔야 한다 결심했어요.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은 사회학은 말로 할 수 없다는 것이에요. 사회학의 진짜 목적을 생각할 때 과학적 지식으로 사회에 영향을 주고자 하면, 활동이 있어야 해요. 행위자로 움직여야 합니다. 논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활동하면서 확인한 것은 어떤 때는 대학교수들이 세미나에서 발표하는 것과 활동가들이 길에서 체험한 것을 발표한 것을 듣고 비교해보니 활동가 발표가 더 유익해요. 더 좋아요. 교수들보다. 그래서 사회학 교수들은 길에 나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고 그것 때문에 한국 사회학회에서 소외되기도 했어요.
한국에서 대학교수로 80년대를 산다는 것
학교에서는 학생 데모가 많았어요. 사회학과에서 데모 안 하는 학생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잡혀간 학생 나올 수 있게끔 교수가 가서 학생을 데리고 와야 했어요. 저도 몇 번이나 그렇게 했어요. 성명서 내는 일도 자주 있었는데 성명서에 서명하는 교수는 아주 소수였어요. 그런 분위기 아직 기억나요. 나는 85년 귀화했기 때문에 그 후부터는 서명해도 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늘 서명했어요. 서명하는 다른 교수들과 좀 더 가까운 사이라고 느끼게 되었죠. 다른 대부분 교수는 내가 미국 출신이니까, 사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회 운동 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 같아요. 그들은 그렇게 하면 우리 가족이 손해 볼 것이라 생각했고, 독재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무력한 마음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귀화
85년에 귀화했어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부터 언젠가 귀화하는 것이 맞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83년에 제3수련을 갔고 한 달 피정을 하면서 식별하는 시간이 있었죠. 그때, 기도 중에 식별해보았는데 역시 귀화해야 한다고 답 얻었어요. 제일 강하게 와 닿은 것은 귀화하면 미국 시민권이 없어진다는 것이에요. 그것이 제일 깊은 의미라고 생각했어요. 한국에서 전쟁이 나거나 큰 문제가 생겨도 내가 도망갈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가장 의미 깊다고 생각했었어요. 실제로 이제는 비자 없이 갈 수 없는 상태에요. 정체성으로도 ‘내가 미국 사람이다’ 그런 정체성 많이 없어졌지요.
천도빈 활동이 내게 남긴 것
나는 신부이고 학자이자 동시에 천도빈 회원으로 활동 함께 했어요. 동시에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떤 때는 힘들죠. 갈라지고, 둘 다 잘하지 못하고. 그러나 천도빈을 통해서 학자로서 성직자로서 더 의미 있는 연구와 사목을 할 수 있었어요. 나는 85년에 한국 국적 얻었지만, 그것만으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생기는 것 아니죠. 천도빈 활동 그러니까 지역 주민들과 공동체 조직하는 활동하면서 내가 한국에 소속되었다는 정체성 가지게 되었어요. “몸은 수입이어도, 마음은 한국산”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여전히 외국 사람이었지만 주민들도 박문수는 천도빈이고, 활동가다, 활동가를 도와주는 사람이다, 이렇게 이해했고 나의 정체성 더 견고하게 생겼어요.
빈민사목의 마스코트
나는 외국인이고, 외부인이라는 것 여러 번 생각했어요. 어떤 면에서 나는 마스코트였던 것 같아. 스포츠팀의 마스코트 있잖아요? 사랑을 받고, 귀여운 (웃음) 나는 외국인이고 성직자고 교수였으니까 사회에서 보기에 존경받는 부분이 있었고, 그런 사람이 함께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기분 좋아하고 환영하는 점 있었어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완전히 그 안에 받아들여지는 데 어려운 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마스코트 같은 역할 했다고 생각해요.
Community of Insertion, 한몸 공동체
한몸 공동체에서 사는 것은 아주 달랐어요. 서강대 사제관이나 다른 예수회 공동체에 살 때보다 지역 주민들 삶 곁으로 갔을 때 따로 얘기하지 않아도 직접 보고 직접 듣는 것이 많아요. 작은 공동체는 요구되는 것 많지 않아서 주민과 함께하는 시간도 훨씬 많이 생겼어요. 생활도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달동네에 사는 사람과 같은 생활 조건으로 살고자 했어요. 차가 없고, 좁은 집에서 살면서 침대가 없는 것뿐 아니라 작은 책상만 둘 수 있는 좁은 방에 살았어요. 집이 작아서 모든 소리가 다 들렸어요. 방에 있어도 사람이 다 눈에 보입니다.
무악동에서
무악동에서 산 것, 빈민운동과 주민운동, 무악동 선교본당 주임신부로 일한 것은 구별 할 수가 없어요. 거기서 내 삶 다 섞여있죠. 무악동과 나의 관계는 91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있어요. 그 사이 빈민사목 활동도 계속되었죠. 선교본당에 서로 친하게 지내는 세 가족이 있었어요. 그 가족들이 모두 같은 해에 출산을 했어요. 그래서 각 집에 아이 하나씩 하나씩 태어나고, 같은 날 세례 성사 주었어요. 선교본당의 너무 귀한 세 아이들이었죠. 그들이 자라는 것을 보고, 첫 영성체 하는 것도 보고, 지금은 모두 대학생, 직장인이 되었어요. 선교본당에서 제일 기쁜 일이었어요.
인권연대 초대 소장으로
세 번의 강정 평화컨퍼런스, 탈핵순례, JCAP 차원의 사회사도직 연대. 그런 것 모두 참 보람 있었어요. 또 시모노세키 노동교육센터와 연대하면서 핵발전소 반대운동 뿐만 아니라 조선학교, 우리학교 존재 알게 되고 그 관계도 이루어졌죠. 계속되는 만남과 배움을 통해 너무나 고맙고 아주 풍부한 몇 년이었어요. 연구센터는 국제적 연대가 참 중요해요. 나는 보람도 많이 느꼈고 그 효과도 직접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연구센터가 그런 일을 계속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서강대로
서강대로 간 것은 진짜 갑작스러웠어요. 그때 큰 논쟁이 되는 것이 있었지요. 나는 그런 논쟁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씩 듣기만 했어요. 하지만 관구장 신부님과 만나 얘기하다가 그분은 박문수 신부가 다음 이사장이 되는 것 바라고 있다고 말하셨어요. 관구장께서 요청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즉시 그 느낌을 받았어요. 하느님의 뜻이라면 응답해야 한다, 그렇게 좀 더 쉽게 결정할 수 있었어요. 서강대 상황은 아주 복잡했어요. 이사장 임기 상당히 힘들게 시작했습니다. 법인을 비판하고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학생들과 토론회를 갖고 대답해야 하는 것은 무척 힘들었어요.
팔순 또는 79세
제일 큰 축복은 사람들이에요. 빈민운동, 주민운동, 평화운동, 환경운동 하면서 만난 모든 사람과 좋은 인연 맺었어요. 올해 팔순이라는데 너무 빠르다고 생각해요. 나는 아직 칠십 대이고 11월 2일 되어도 만으로 79세예요. 아직 태어난 지 팔십 해 안되었어요. 그래서 인공적인 느낌 느껴. 팔순은 너무 빨리 계산한 것 같아요. 노인이 되었다는 것 확실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쉬는 노인이 될 이유가 없다고 할 수 있어요. 활동적인 노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그것 고마운 일입니다. 대부분 노인들 쓸모없는 존재 될까봐 걱정이 되고, 그렇게 느끼게 되면 외로움 더 많이 생겨요. 나는 아직까지 그런 느낌 없기 때문에 아주 고마운 팔순이에요.
당신 눈으로 바라본 한국사회, 한국교회
아 슬프도다, 한국의 언론 자유 죽어간다
혜화동에서 신학대학을 다니는 동안 한국사회의 여러 모습을 보았어요. JOC가 생기고 있었고, 그들은 노동조합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들은 갑자기 잡혀가고, 고문을 당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고생했어요. 또 일찍이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어요. 한국에 도착한 지 몇 주밖에 되지 않았을 때 한국어 학원에서 돌아왔는데, 1년 선배인 예수회원들이 열심히 아는 기자에게 전화 돌리고 있었어요. 정일우 신부님이 시내에서 혼자 데모하고 있다고 기자들이 나가서 취재하라는 내용이었어요. 그때 박정희는 3선 할 수 없도록 한 헌법 바꾸려고 시도했는데 이것을 반대하는 야당의 목소리를 못 나오게 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의 언론 탄압이 이뤄졌는데 정일우 신부님은 자기 가슴에 작은 시처럼 “아 슬프도다. 한국의 언론 자유 죽어간다.” 이렇게 쓰고 데모한 것이죠. 결국은 잡혀 들어갔고요. 그때 확실히 언론 자유를 억압하고, 다른 목소리를 탄압하는 정부의 모습 알게 되었어요.
여자 교수는 안 된다
사회학과는 1981년에 생겼는데 처음에는 여러 건물을 옮겨가며 수업하다 다산관이 생기면서 거기 들어갔죠. 그때는 학생 수도 갑자기 늘어나고, 건물도 갑자기 많이 지어야 하는 그런 시대였어요. 사회학과를 처음 시작할 때는 나와 버내스키 수사님 우리 두 예수회원만 있었어요. 그래서 선생님을 빨리 모셔야 하는데, 조옥라 교수님이 아주 좋은 후보였어요. 하지만 다른 남자 교수들이 반대했어요. 그때는 여자 교수는 영문학과에만 있었어요. 학생들에게 영향을 많이 줄텐데 사회학과에 처음 들어오는 교수가 여자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계획보다 한 학기 늦게 조옥라 교수님 들어올 수밖에 없었어요. 학교 많이 변했어요.
80년대의 긴장
기억나는 게 젊은 예수회원들 정일우 신부님 하는 활동에 매력을 느꼈고, 또 사회적 활동 하고 싶어 했어요. 반면에 김태관 신부님은 물론 그분은 예수회원 가운데서도 지식인이자 하나의 모범이었어요. 열심히 글 쓰고 공부하는. 그러나 신부님은 자신도 독재를 비판하면서도 외국인들이 반정부적인 이야기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어요. 그래서 젊은 회원들은 샌드위치가 되었어요. 한편으로는 정일우 신부님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김태관 신부님은 그것을 싫어하셨으니까. 김태관 신부님은 젊은 예수회원은 공부 많이 해야 한다, 정의구현은 나중에 해야 한다 그런 입장이셨어요. 그런 긴장 기억나요.
전두환의 새 시대와 비자
나는 일찍이 서강해럴드 지도교수였어요. 영어 신문이지요. 그래서 학생들은 경찰들이 감시하는 게 영어 신문까지 닿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영어 신문에 정권 비판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방학 때 내가 피정 지도로 자리를 비우고 다른 예수회원이 잠시 담당을 맡았어요. 아직 한국어 확실히 모르는 분이었는데 나를 대신해 영어 표현을 고쳐달라고 부탁했어요. 누가 서강해럴드에 만평을 그렸는데 당시 전두환 정권이 시작되는 시기였어요. 전두환의 새 시대였죠. 그런데 ‘새시대호’라는 배가 구멍 나고 가라앉는 그런 만평이 실렸어요. 나대신 담당한 예수회원은 그냥 아무렇지 않게 허락했고 신문이 다 인쇄되어 배포하는 날 경찰이 와서 못하게 했죠. 잘 모르지만 아마 인쇄소도 감시를 받아요. 그런 것 고발하지 않으면 곤란하게 되니까 아마 경찰에게 알린 것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그때 내 비자가 없어졌어요. 총장 신부님이 마포 경찰서에 찾아가서 이 사람은 작년에 한국에 와서 상황 잘 모른다고 핑계를 대고 그런 에피소드 있었어요.
사라져가는 농촌 공동체
내가 하는 연구는 주로 가톨릭교회 운동과 가까운 것이면서 농민, 노동자, 도시 빈민과 관련된 연구였어요. 대체로 큰 규모의 연구고, 다른 사회학자나 활동가들과 같이 연구하고 책을 엮고 그랬어요.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 하나는 농촌 공소에 대한 전국 조사였어요. 하지만 천주교회가 그것 별로 실천을 안 했죠. 제일 큰 이유는 사제들이 도시에 살고자 했어요. 그래서 농촌 사람들이 도시 본당으로 와야 한다고만 생각했고, 사제는 시골에 자주 가지 않고, 아주 예외적으로만 가서 미사해요. 말하자면 사제들은 미사, 성사 집전만 생각했고 어떤 농촌 공동체, 신앙 공동체 더 키워야 한다는 그런 개념이 너무 없었어요. 공소 사람들이 사실은 그런 것을 바라고 있다는 바람 연구를 통해 드러났어요.
계속되는 재개발
그때는 한국에서 흔히 공유하는 이데올로기, 우리는 아주 부끄러운 가난함을 겪었다. 그래서 우리는 빨리 성장해야 하고, 부자 되고, 선진국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민족이 자랑스럽게 사는 민족이 된다 이런 의식이 강했어요. 이런 이데올로기에 국가가 밀어붙이는 정책이 합쳐져서 서울시는 주민들의 생활을 선진국 모습처럼 만들겠다는 목표로 일했어요. 가난함을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것, 남 보기 부끄러운 것을 감추는 것. 그런 것이 있었어요.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 준비하는데도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을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가?’ 중심으로 도시 계획이 이루어졌어요.
빈민사목의 의미
빈민사목에서 빈민은 가난한 사람을 뜻한다기보다 억압받는 사람의 개념이에요. 사실 교구에서 공식적으로 빈민사목위원회를 만들 때 그런 논의도 있었어요. “이것이 정말 빈민사목이어야 하는가?”, “빈민, 부자 같은 대조적인 말을 우리가 피해야 하지 않을까?” 나도 그런 생각 많이 했어요. 안타깝다. 빈민사목이라는 명칭 선택한 것. 지역사회 정의구현 사목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누가 가난하냐? 누가 제일 물품이 없나? 그렇게 제일 돈이 없는 사람을 찾아서 사목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거든요. 사회 구조로 인해 억압받는 사람들, 그들이 해방될 수 있도록 하는 해방신학의 개념이었어요. 억압받는 사람 스스로 힘으로 억압에서 벗어나고 자유롭게 되고 정의를 구현하는 그런 사회적 원칙에 따라 사람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것이었어요.
빈민운동의 위기
빈민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도 점점 좋아지고 있었습니다. 소비가 더 늘어나고 가난한 사람들도 돈을 벌 기회가 늘어나고 아이들의 교육도 잘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공부방도 더 많이 생기고, 빈민들의 사고방식 많이 변하기 시작했어요. “우리도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 중산층이 되고 싶다.”는 정신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빈민 운동하는 사람들은 좀 위기를 느꼈어요. 주민들도 빈민이라는 말 듣는 것 싫어하게 되고, 운동의 중심이 주민운동의 방법을 더 사용하는 쪽으로 바뀌었어요. 모두가 우리의 활동 방향 바꿔야 한다고 공감했어요.
주민운동의 의미와 가능성
주민운동은 주민이 그들의 지역에서 주인이 되도록 하는 운동이에요. 직접 책임지는 사람이 되고, 그 지역의 미래가 주민들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믿어요.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개념도 있잖아요? 기본적으로 지역 주민들을 믿어요. 그들에게 무슨 방향을 가르쳐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생활에 대하여, 자기 지역에 대하여 책임지는 그 정신을 가르쳐주는 것이에요. 90년대 이후 양상은 달라졌지만 주민운동, 주거권 운동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갈등 사회
한국사회의 갈등 문제 더 심화되었어요. 가장 상징적인 것이 우리나라 대통령 보면 자살하지 않은 대통령은 감옥에 들어갔어요. 국민의 존경을 받는 대통령 없는 거죠. 북한과의 관계도 민족화해나 통일을 말하면 여전히 빨갱이라는 소리가 나와요. 박근혜 정권 때 통합진보당을 해산한 것도 충격이었어요. 정치가 이판사판 싸움이고, 2000년대 이후 그것 더 심각해졌습니다. 아직도 김일성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고, 전광훈 목사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것 비이성적인 것이지만 그들은 버림받았다고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노인들 중에는 그런 생각에 화가 나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 사회가 큰 위기를 맞았어요. 이런 갈등이 커진 이유 불평등의 정도가 더 심각해졌기 때문입니다
세대 갈등
80년대에는 학생운동만 하다가 2.0 학점으로 졸업했던 학생들도 나름대로 성공하는 길이 있었어요. 그러나 요즘 젊은 세대는 그런 기회 전혀 없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경쟁하고, 경쟁하고 그것 밖에 할 수 없는데도 대학교를 졸업해도 취직도 어렵고, 집도 얻지 못하고, 결혼 준비도 못하는 그런 소외감 있어요. 서강대 사회학과 이철승 교수는 세대 간 갈등 많이 강조합니다. 나는 부끄러움만 당하고 성취할 수 없는 젊은 사람들 보면서 그 갈등 많이 느껴요.
순교자의 교회와 주류의 교회
한국교회에서 선교사로 50년을 살았어요. 지난 50년 생각해보면 두 가지 키워드 떠올라요. 하나는 한국교회는 순교자의 교회라는 것이에요. 또 다른 하나의 키워드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천주교는 주류라는 것이에요. 두 가지 생각해보면 대조적이죠. 순교자는 죽여야 할 나쁜 사람이었는데, 지금 천주교는 완전히 주류에 속하죠. 대통령도 천주교 신자고, 코로나19 대응 보면 대통령은 개신교와 천주교 확실히 구분해서 성당은 정부와 함께 한다고 믿고 있어요. 한편으로는 신자들이 한국사회의 흐름 그대로 따릅니다. 복음과 어울리지 않는 것도 그대로 따르고자 하는 경향 나타납니다. 주류가 될수록 순교의 교회 성격 잊고, 세속화 되는 위험 있어요.
경계와 긴장 사이, 항상 그 자리에 (면담자의 에필로그)
신부님을 인터뷰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당신 말씀처럼 좀처럼 실망하고 상처받는 일이 없었다는 신부님의 에피소드는 어딘가 싱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격양된 감정이나, 깊은 우울, 삶을 뒤흔든 체험 같은 것은 듣기 어려웠다. 늘 정갈한 모습의 신부님 내면에 깃든 인간적 고뇌를 포착하고 싶다는 것은 어쩌면 지나친 욕심이었다. 그러나 참 담백한, 또 때로는 너무나 솔직한 신부님의 구술을 기록하며, 스스로에 대해 숨김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지난날을 꾸미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20년 여름, 매주 금요일 오후를 신부님과 보냈다. 그 배움의 시간에 느낀 신부님을 감히 나의 언어에 담아 나눈다.
경계에 서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신부님은 오랜 세월 미국인이면서 한국인이었다. 교수면서 활동가였고, 사제면서 평신도들과 같은 입장에서 단체에 소속했다. 85년 귀화했으나 외양은 여전히 외국인이었고, 현장에 더 깊이 투신하고 싶었으나 어느 자리에서든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연구자였다. 신부님은 여러 정체성 사이에서 ‘갈라지고, 어떤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기도 했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그 모든 일이 자신을 더 풍부하게 했으며 더 의미있는 삶을 살게 했다고 말한다. 나는 경계에 서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꺼이 경계에 서서 자신의 몫을 다하는, 행복한 경계인의 모습을 보았다.
긴장과 균형
‘기울어지지 않는 것’은 인간관계를 설명하는 신부님의 구술에서 반복된다. 수련원 시절 비들로서 두 개의 예수회 고등학교에서 온 수련자들 사이를 조율하면서, 처음 한국에 파견받고 미국과 한국 회원 사이의 갈등을 목격하면서, 무악동에 들어간 후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 사이의 오해와 반목을 지켜보면서 신부님은 모두와 잘 지내기 위해, 기울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당신의 이런 면에 누군가는 어쩌면 실망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긴장이 계속되는 삶 가운데 그를 지켜낸 것은 이런 균형감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객관적인, 스스로에게조차
신부님은 당신은 ‘빈민사목의 마스코트’였다고 말한다. 완전히 그들의 일부가 되지는 못했지만, 내부에서는 사랑받고, 외부적으로는 그들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신부님은 분명 그런 역할을 넘치게 잘 하셨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주민들에게 인정과 관심을 보내는 존재로 사랑받는 신부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역할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또 인정하는 객관성에 감탄했다.
이런 모습은 존경하는 선배였던 정일우 신부님과 자신은 대조적이라고 말한 부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부님께서 말하는 정일우 신부님은 특별한 카리스마로 사람들과 빨리 깊은 관계를 맺고, 성령께서 이끄는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자유롭게 따를 수 있는 분이셨다. 그러나 당신은 정일우 신부님과 달리 추상적인 이론이 먼저 들어오는 반면, 전체적인 파악은 어려웠다.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관계가 깊어지는 것은 오래 걸렸다. 대신 어느 곳에서든 조직을 만들고 지속성 있게 일하는 것을 궁리했다.
항상 그 자리에
예수회원으로서 60년, 당신의 구술에는 수많은 이름이 등장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 그들은 이미 떠난 사람들이다. 미국에서, 한국에서 여러 기회로 인연을 맺은 형제들은 떠나기도 한다. 동료들이 떠나는 순간을 회고할 때면 “슬펐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신부님께서는 어떻게 여전히 계실 수 있었냐고, 아주 힘들고 지칠 때는 어떻게 하셨냐고 여쭈어도 돌아오는 답은 담백하다. 힘든 순간 당신을 다잡게 한 것은 기도 안에서 느낀 예수님의 위로였다고 말씀하신다. 떠난 것은 예수회의 형제들뿐이 아니다. 함께 운동하는 사람들도 지치고, 떠난다. 그러나 그는 담담하게 자리를 지켰다. 상처받거나 실망하지 않고 다시 다음을 고민했다.
계속되는 길 위에서
신부님과의 마지막 인터뷰는 “나는 아직 만 79세라서 팔순은 너무 이른 느낌”라는 당신의 유쾌한 말씀을 끝이 났다. 그리고 당신은 아직 활동하는 노인이어서 기쁘다고 하셨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다. 이번 여름과 가을, 신부님의 목소리를 듣고 정리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인지 이번 미국 대선을 보며 나는 신부님 생각이 많이 났다.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된 조 바이든과 신부님이 겹쳐 보인 것이다. 78세인 바이든과 신부님은 겨우 1살 차이다. 둘 다 가톨릭 가정에서 자라 가톨릭 학교에 다녔고, 케네디 시절 미국에서 그리고 바티칸공의회 시기 가톨릭교회에서 젊은 시기를 보냈다.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따라 공동선을 실천하고 세상을 더 좋은 것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도 공유한다. 여기에는 교회도 미국도 희망에 차 있었던 그들의 젊은 시절이 삶 전체에 드리운 영향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바이든은 78세에 임기를 시작한다. 바야흐로 젊은 노인의 시대다.
신부님은 정일우 신부님과 제정구 의원이 남긴 일은 10년, 20년이 아니라 100년에 걸쳐 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당신께서도 그 일을 계속하겠다고 하셨다. 그들이 남긴 과제는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고, 이웃이 되고 참 인간이 되는 삶이다.
갈등은 더 깊고 복잡해지며, 과거의 아름다운 유산들은 빛을 잃어가지만 새로운 문제들은 힘을 얻어가는 세상에서 이런 삶의 형태가, 이런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답은 모른다. 그러나 신부님은 다시 그 자리에서 담담하게 당신의 일을 계속하실 것만은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