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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과 편향

2022년 7월호 경향신문 기고
보편이란 무엇인가?
보편이란 무엇일까? 지난 몇 달간, 차별금지법(평등법) 제정을 둘러싼 찬반 논란과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을 위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시위에 관한 논쟁을 지켜보며 새삼 가지게 된 의문이다. 소수자를 향한 차별에 반대하는 인권 단체만이 아니라 이를 비판하는 이들 역시 ‘보편적 인권’을 근거로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와 입법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 인권’에서 ‘보편’은 자격이나 조건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보장된 어떤 것을 뜻한다. ‘세계인권선언’ 제1항의 첫 문장,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라는 선언은 보편적 인권의 ‘보편’이 뜻하는 바를 보여준다. ‘세계인권선언’이 1948년 두 차례의 세계 대전으로 수많은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이 잔혹하게 짓밟힌 끝에 모든 인류가 함께 지켜야 할 하나의 윤리 기준으로 선포되었음을 상기할 때 보편적 인권은 모든 인간에게 동등하고 평등하게 주어지는 권리라는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이러한 ‘보편적 인권’의 ‘보편성’에 근거할 때, 장애인의 이동권이나 성별, 장애, 나이, 성적지향,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언어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의 보장을 ‘보편적 인권’의 침해를 이유로 반대하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보편적 인권’의 본질적 의미가 곧 인간이라면 누구나 천부적으로 갖는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리의 보장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고,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인권은 누군가의 권리를 보장한다고 해서 다른 이의 권리가 제한되는 성격의 권리가 아니다.
보편과 편향의 역설
장애인의 이동권 시위가 비장애인의 출근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차별금지법이 소수자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다수를 차별하는 법이라는 이유로 비난하는 목소리에는 ‘보편’에 관한 오해가 서리어있다. 소수자의 권리 보장이 다수자의 권리를 제한하며 이것은 보편적 인권의 침해라는 주장은 ‘보편’을 곧 ‘다수’로 이해한 데서, 즉 ‘보편적 권리’가 ‘다수의 권리’라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확인했듯, ‘보편’은 결코 ‘다수’를 뜻하지 않는다. 보편은 ‘모두’를 뜻한다.
물론 소수자의 동등한 권리 보장을 위한 과정에서 다수의 불편이 따를 수 있고, 이에 대한 이 다수의 반감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보편이 모두를 뜻한다면 왜 보장되어야 할 권리의 주체로 반드시 ‘소수자’가 호명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의문이 일어나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2013년 시작돼 2020년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으로 국제적 운동이 된 ‘Black Lives Matter(블랙 라이브스 매터, BLM)’는 보편적 인권이 왜 때로는 ‘모두’가 아니라 ‘소수자(흑인)’를 호명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지는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는 뜻의 ‘Black Lives Matter’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경찰의 잔인함과 과잉 진압에 따른 사고에 대항하는 비폭력 시민불복종 운동을 말한다. 그리고 이에 대응해 흑인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는 ‘All Lives Matter’ 역시 언론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폭넓게 전파됐다. 물론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 이 구호의 문자적 의미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All Lives Matter’가 사용된 맥락에 있다. ‘All Lives Matter’는 ‘모두’를 향하는 보편성의 지향이 때로는 어떻게 차별과 고통의 특수한 맥락을 지워버리는 수단이 되는지 보여준다. ‘All Lives Matter’는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구호로 특별히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만 가혹한 공권력의 행사와 그로 인해 흑인들이 겪어온 고통과 죽음의 특수성을 손쉽게 덮어 버리고 만다. 이때 ‘모두(All)’를 향한 보편의 지향은 한 번도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어본 적이 없는 이들을 위한 ‘편향’이 되고 만다. 보편과 편향의 역설이다.
하느님 나라와 보편적 구원
혼 소브리노 신부는 그의 저서 『해방자 예수』에서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는 ‘본질적으로 편향적’이라고 설명한다. 하느님 나라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도덕적 우월성이 아닌, 지적 탁월함이 아닌 ‘가난’ 그 자체로 인해 하느님 나라가 가난한 이들의 것이 되리라는 예수의 지향은 당대에도 많은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소브리노 신부는 거듭 그때도 지금도 하느님 나라는 오직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나라이며, 가난한 이를 향한 예수님의 편향이야말로 당신의 공정함을 증명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시대에 ‘가난’은 경제적 결핍과 사회적 멸시와 차별 모두를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난한 이들은 차별받고 배제당하며 동등한 몫을 누리지 못하는, 의롭지 않은 상태에 놓인 이들이다. 하느님 나라는 모든 이를 향한 보편적 구원이지만, 이 보편성이 가난한 이를 향한 편향성을 거부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가장 가난한 자에게 생명과 존엄이 주어질 때 비로소 보편적 구원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난한 이를 향한 ‘편향’으로 ‘보편’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