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호 경향신문 기고
소통의 의미
소통 즉,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라는 말의 라틴어 어원 ‘communicare’는 ‘공유하다’, ‘함께 나눈다’는 뜻이다. 경험을 나누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의 공동체(community), 여러 사람들이 함께 나누는 생각이라는 뜻의 상식(common sense), 예수님의 몸과 피를 나누는 성찬(communion) 역시 같은 어원에서 유래했다.
한자어인 ‘소통’의 사전적 의미 역시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을 뜻한다. 소통이든 커뮤니케이션이든 그 본질적 의미는 서로 오고 가는 것, 나누는 것, 공통의 것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흔히 ‘커뮤니케이션’의 의미가 쉽게 미디어의 활용이나 홍보를 위한 활동으로 좁혀지는 것은 다소 아쉬운 일이다.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교황청 부서(Dicastery for communication)’의 공식적인 한국어 번역이 ‘홍보를 위한 교황청 부서’인 것 역시 아쉽다. ‘홍보’라는 이름이 널리 알린다는 의미 그 이상을 뜻하는 커뮤니케이션이 가지는 풍요로운 어감과 여러 언론과 기관을 통합하며 새로운 부서의 이름으로 역시 ‘커뮤니케이션’을 선택한 교황청의 지향을 다소 좁힌다고 느끼는 탓이다.
완벽한 커뮤니케이터
코로나19가 우리의 일상 곳곳에 깊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도 벌써 2년 전이다. 2020년 5월에 쓴 어느 칼럼에서 나는 “모든 것이 낯선 이 시기가 이토록 오래갈 줄 몰랐다”고 쓰고 있다. 코로나19가 시작될 무렵만 해도 정말로 두어 달이면 모든 것이 끝나리라 믿었던 것이다. 계절마다 규칙을 달리하며 이어졌던 ‘거리 두기’들 속에 보낸 지난 2년간, 커뮤니케이션은 교회와 사회의 여러 차원에서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모두가 코로나19가 가져올 고립과 단절에 대해 걱정했고 이는 확실히 극복해야 할 도전이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우리의 소통이 멈추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곧 낯설기만 했던 재택근무, 온라인 화상회의에 익숙해졌다.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소통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게다가 커뮤니케이션은 단지 말과 글, 대화와 만남에서 그치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 없이 우리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 신학’에서는 하느님 자체가 곧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본다. 창조는 하느님께서 그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소통하신 결과이며 하느님은 모든 수단을 통해 그 자신과 인간 그리고 피조물과 온 자연과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기 전에는 예언자를 통하여 그리고 그 이후에는 당신 아드님을 통해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상징과 표징을 넘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 소통하고자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완벽한 커뮤니케이터다.
질문과 도전 사이, 남겨진 몫
코로나19 이후 그동안은 새로운 매체의 활용에 소극적이었던 교회 역시 적극적으로 소셜미디어 세계에 뛰어들었다. 다양한 신앙 콘텐츠들이 만들어지면서 그동안 신앙생활의 중심이었던 전례와 소모임이 일시 정지된 시간과 공간을 새로운 시도들이 채워나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전히 이 노력들 역시 너무 자주 그리고 여전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우리가 그동안 해왔던 것을 잘 전달하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닌가 돌아본다.
직장에서 또 신앙 공동체에서 자주 커뮤니케이터의 역할을 맡게 되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 커뮤니케이터는 어떠해야 하는가는 큰 질문이자 과제다. 페이스북과 같은 세계적인 소셜미디어 기업이 사람들의 취약한 심리를 자극해 이익을 창출하고, 인권이나 민주주의 같은 공공의 가치를 기업의 이득을 위해 손쉽게 무시하거나 이용한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난 이상, 소셜미디어는 과연 그리스도인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정말 적합한가 하는 윤리적이고 근원적인 질문도 남는다. 한편으로는 클럽하우스니 메타버스니 하니 시시각각 바뀌는 트렌드를 교회의 한정된 재원과 역량으로 따라가는 것이 너무나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역시 그리스도인이 마주한 도전 앞에 영감의 근원은 완벽한 커뮤니케이터로 세상에 오시고 우리를 다시 커뮤니케이터로 부르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다. 그의 삶 전체가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느님의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커뮤니케이션이었기 때문이다. 소통하는 것, 서로 나누는 것이 곧 인간의 본성이라면 이는 명백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일 것이다. 복음에 전해지는 예수님의 열정적인 소통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온전히 자신을 내어주셨다.
오늘날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이 말하는 미디어의 최전선에 서 있지 않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아름다운 성음악은 한때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가장 앞서나간 미디어였으나, 어느덧 우리는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는데 숨이 찬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적인 미디어 기술의 전문가는 아닐지 모르나, 언제나 사랑과 생명을 말하고 전하는 사람들이다. 사랑 안에 일치와 발전을 도모하는 것은 커뮤니케이터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항구한 미션이다.
이 미션을 잊지 않는 것은 웹사이트를 관리하고, 우리 자신을 선전하는 기술보다 중요하다고 믿는다. 커뮤니케이션이 도구나 기술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것이며 사랑에 관한 것임을 잊지 않을 때 우리는 진정 우리의 미션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다른 이들에게 어떤 커뮤니케이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