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나(가명) 씨는 로스쿨 졸업을 앞둔 서른넷의 여성이다. 지난 1월 변호사시험에 응시했고 지금은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시험 결과가 발표되는 4월까지 지금 그의 삶은 일시 정지 상태다.
이미나 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도의 어느 신도시에서 자랐다. 딸 셋 가운데 맏이로, 또래보다 키가 큰 여자아이로 자라며 그는 “여자라고 무시당하고 살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58년생 충남 부여 출신이고, 어머니는 64년생으로 서울 사람이세요. 아빠는 어려서 이미 서울에 올라와서 자라셨어요. 아빠 사촌동생이 친구인 엄마를 소개해 줬고, 2년 정도 연애하다가 결혼했다고 해요. 그 후 제가 태어났고요, 제 밑으로 여동생 두 명을 더 낳으셨어요.
아빠는 워낙 무뚝뚝한 편이에요. 어렸을 때 제가 느꼈던 아빠는 너무 무섭고 가부장적인 사람이었어요. 저는 특히 덤벙거린다고 많이 혼이 났어요. 아빠에게 제일 자주 들은 이야기가 “차분하게 행동해라”, “큰 딸처럼 행동해라”는 말이었어요.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아빠는 인간관계에 대해서 서툴고 표현하는 법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아빠랑 얘기하면 늘 “성적 올랐냐?” 그런 얘기였으니까 대화하기가 싫었어요.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아빠는 꽤 가정적인 사람이었고 참 노력을 많이 했구나 싶어요. 아빠는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항상 딸들이 무조건 일등이라고 하세요. 요즘은 그동안 우리가 너무 아빠를 몰랐구나 싶은 거죠.
엄마는 24살 때 결혼해서 어린 나이에 아이 셋을 낳았는데 그래서 그랬는지 하고 싶은 것이 많고 적극적인 사람이었어요. 저는 학교 다니면서 걸스카우트 단장이나 학급 반장 같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는데, 엄마가 참 적극적으로 저를 서포트 했어요. 생각해 보면 여섯 살 어린 막내 동생도 있고 활동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을 텐데도요.
할머니와 어려서부터 같이 살았고, 외할머니도 근처에 사셨어요. 하지만 우리 집은 제가 딸이라서 차별받은 것, K-장녀로서 희생하고 그런 것은 없었어요. 할머니도 특별히 아들을 선호하지도 않았고 아빠는 딸이 셋인 것을 진심으로 좋아하셨어요. 외할머니는 정말 여장부 같은 분으로 저에게 영향을 많이 주셨어요. 제가 학교에서 학생회장 같은 것을 맡으면 “우리 회장님” 하면서 늘 치켜세워주고 항상 저를 자랑스러워하셨어요.
이미나 씨는 교육열이 높고 자녀들의 교육에 기꺼이 투자할 의지와 경제력이 있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이미나 씨가 중학생이던 때, 경기도에서 다시 서울로 이사했다. 고등학교는 성적과 입시에 대한 압박이 심한 곳이었지만 이미나 씨는 특별히 더 힘들거나 덜 힘들지 않게, 여느 또래처럼 이 시기를 통과했다.
중학교 때 서울로 이사 오면서 한번 꼬꾸라지는 경험을 했어요. 전학 가기 전에는 친구가 많은 편이었는데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지내는 것이 많이 낯설었어요. 고등학교에 가면서 다시 괜찮아졌는데, 고등학교는 모두 다 처음 만나니까요. 이사 온 이유는 아빠가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것을 원하셨어요. 아마도 제 교육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때 제 성적이 안 좋았거든요. 엄마 아빠는 지금도 거기에 한이 있어요. 좀 더 일찍 서울에 왔더라면 외고도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요. 고등학교는 성적순으로 자리를 앉히고 교사들도 좀 권위적인 분도 있고 한 분위기였어요.
그래도 저는 입시 스트레스는 크지 않았어요. 엄마는 특별히 입시에 대한 부담을 주지는 않았어요.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선생님이 깨워도 아침 시간에는 주로 엎드려 잤던 기억은 나요. 야자도 싫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고, 담장을 넘어 도망치는 것도 한두 번 해보니 이 정도면 됐다 싶더라고요. 문학을 좋아했고 글쓰기 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어요. 책 읽는 것을 좋아했어요. 대학은 신문방송학과를 가면 어떨까 생각했지만, 꼭 가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수능을 망했는데 부모님이 우리 집에 재수는 없다고 해서 성적 맞춰 갔어요. 아빠는 바로 여기저기서 정보를 얻어와 여기 가는 게 좋겠다고 코치하고, 논술학원도 다니고 그랬어요. 부모님이 교육에 욕심이 있는 편이었어요.
아빠가 제가 고3 때 오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셨어요. 아빠가 집에 있을 시간이 아닌데, 계속 있는 것을 보고 제가 “엄마, 혹시 아빠 회사에서 짤렸어?” 물어보았더니 엄마가 걱정을 많이 했어요. 제가 고3인데 집안 사정을 걱정할까 봐. 그런데 저는 정작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아빠는 곧바로 더 좋은 회사에 더 높은 직급으로 스카우트되셨어요. 가족의 경제적 상황이 저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으니까 한 번도 우리 집이 돈이 없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나중에 로스쿨에 가고 “아 우리가 그렇게까지 부유한 건 아니구나!” 느꼈어요.
이미나 씨는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그리고 20대에 경험한 초등부 교리교사 활동은 그의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과정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
친가는 엄청난 가톨릭 집안이었어요. 아빠 말로는 순교자 집안이라는데 저는 잘은 몰라요. 어릴 때부터 연도도 많이 하고 했던 기억은 나요. 엄마는 결혼하면서 천주교 세례를 받으셨어요. 어려서부터 쭉 성당에 다니면서 첫 영성체, 견진성사도 받고 성가대 활동도 했어요. 성당은 저에게는 그냥 가야 하는 곳이었던 것 같아요. ‘일주일에 한 번 가지 않으면 벌을 받는 곳’ 그런 느낌이었어요.
고3 때 서강대에 원서를 쓰면서 성직자 추천전형을 지원하게 되었어요. 그때 본당 신부님이 “내가 너를 잘 모르는데 어떻게 추천을 하겠냐”라고 하셨어요. 같이 갔던 엄마가 그때 “얘는 대학생이 되면 초등부 교사를 할 애”라고 얘기하고, 신부님이 그 말을 믿고 추천서를 써주셨어요. 서강대는 결국 떨어졌지만 그 약속은 지켰어요. 그런데 대학교 1학년 때 경험한 초등부 교사 생활은 좋은 경험은 아니었어요. 먼저 교사로 활동하던 언니들의 텃세도 있고, 권위적인 문화도 많고 저도 싹싹한 성격은 아니어서 적응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약속한 1년만 채우고 그만뒀어요.
사실 대학생 때는 미팅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대략 100번쯤 한 것 같아요. (웃음) 그때는 토요일에 초등부 미사 때문에 성당을 가야 하니까 미팅을 못 나가는 게 너무 속상하더라고요. 초등부 교사를 그만두고 2학년 때부터는 하고 싶었던 일은 다 해본 것 같아요. 국토대장정도 가고 유럽여행도 다녀오고 교환학생도 갔다 왔어요.
성당 활동은 나중에 다시 시작했어요. 스무살 때 같이 교사로 일했던 친구가 참 성격이 잘 맞았는데, 20대 중반이 돼서 자기가 이제는 초등부 교감을 맡고 있다고 다시 들어오라고 했어요. 이제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고. 저도 그때는 사회 경험도 쌓이고 스물다섯 여섯때쯤이었으니까 휘둘리지 않을 자신도 있고 해서 다시 초등부 교사로 들어갔어요. 그때 참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임원은 맡고 싶지 않았어요. 책임지는 위치에 있고 싶지 않아서요.
나중에 20대 후반에 남미 여행을 길게 떠났다 돌아오고 나서는 교감 일도 맡아서 했어요. 제가 할 순서였고, 제 방식대로 주일학교를 꾸려가는 것에 모두 지지한다는 조건으로 교감이 되었어요. 그때는 성당 활동이 부대끼면서도 보람도 있었어요. 내가 리더십이 있구나 느끼기도 했고, 회사 생활보다 교리교사 활동에 더 집중하던 시절이 있었죠.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다 보니까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성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너무 이상했어요. 제 스스로도 납득하기 어렵고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도 설명이 안 되는 부분들이 많았거든요. 언니들이 뒤로 갈수록 괜찮아진다고 설득했는데 저는 창세기, 탈출기, 마르코, 요한 가면 갈수록 더 싫어졌어요. 결국은 요즘 세상에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가르치는 천주교라면 나는 아이를 낳으면 절대 성당에 보내지 않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이미나 씨는 자신의 20대 후반이 에너지로 넘치던 ‘전성기’라고 회고한다. 하루 종일 이런저런 활동으로 시간을 보내면서도 지치지 않았던 ‘체력의 황금기’이기도 했다. 한편 취업과 이직, 긴 여행 사이에서 다가올 삶의 시간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법대를 다녔기 때문에 감정평가사나 노무사가 되려고 공부도 했었어요. 그러다 때려치우고 취업을 준비했는데 잘 안됐어요. 계약직으로도 일하고 중소기업도 다니고 이직을 여러 번 했어요. 한 회사에서 우연한 기회로 홍보팀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 길로 홍보, 마케팅 쪽 일을 했었어요. 그런데 심각한 박봉이었어요. 이렇게까지 일하면서 이런 대우를 받고는 계속 일에 흥미를 유지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회사를 그만뒀어요.
그러다 대기업 파견직으로 일하면서 바짝 돈을 모아서 5개월간 남미 여행을 다녀왔어요. 대학생 때 교환학생을 가서 만난 브라질 친구들이 있었고 늘 한번 찾아가겠다고 얘기했었거든요. 치안이 안 좋다고 반대하는 아빠랑 매일 싸워가면서 결국 남미에 갔는데 사실은 저도 불안했던 것 같아요. 남미에서 보낸 시간 동안 매일매일 묵주기도를 바쳤어요. 그 시간이 저에게는 참 축복이었어요.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다시 취업이 안 돼서 나락에 빠지기도 하고, 작은 회사를 다니면서 초등부 주일학교 교감도 하고 그런 시절이었죠.
저는 어렸을 때부터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막상 대학에 가서는 미팅하고, 썸 타고, 연극 보러 다니고 이런 데 더 집중하면서 좀 멀어졌죠. 그러다 초등부 교사로 일하면서 아동 인권이나, 가난한 사람들, 소수자들의 권리에 대해서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아요. 또 그때 한참 국정 농단 사건으로 박근혜 퇴진 시위가 있던 때였는데 그때는 제가 친구들에게도 같이 가자고 설득해서 시위하러 가고 그랬어요.
그때는 아침에 일어나서 동아리 모임에 가서 준비하다, 성당에 가서 초등부 교리하고 다시 동아리로 돌아가서 게임을 한참 하다가 저녁에는 박근혜 탄핵 시위에 갔다가 밤에는 또다시 성당으로 돌아와서 또래 교사들이랑 술 마시고 귀가하는 그런 바쁜 스케줄로 살았어요. 그 와중에 연애도 열심히 했고요. 커리어에 대한 고민은 계속 있었는데 마케팅 일이 나랑 맞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기자나 변호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여성 인권이나 아동 인권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내 목소리는 힘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로스쿨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쉽게 주눅 들지 않고, 부당한 권위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미나 씨의 성향은 그의 삶의 여정에도 여러 흔적을 남겼다.
저는 어릴 때부터 어른들이 어려운 편이 아니었어요. 키도 크니까 남자애들과 몸싸움도 많이 했고, 정말 몸으로 뒹굴면서 싸웠어요. 동생들이 괴롭힘을 당하면 제가 바로 출동하는 그런 느낌이 있었고, 제 동생들은 어렸을 때 “쟤가 미나 동생이래!” 그런 소리를 많이 들었다고 해요. (웃음)
고등학생이 되면서 아빠와도 선생님들과도 정말 많이 부딪혔어요. 친구들은 그 시절의 저를 ‘야생마 시절’이라고 불러요.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담임선생님이 저를 무척 싫어했어요. “너 같은 애가 공부 잘하면 국회의원이 돼서 나라를 망친다.” 그런 말을 한 적도 있어요. 애들 앞에서 저를 혼내서 울리고 싶어 했어요. 하지만 저는 화가 난다고 우는 스타일도 아니거든요. 선생님을 겁내고 두려워하는 아이가 아니어서 더 저를 싫어하셨던 것 같기도 해요.
로스쿨 진학을 앞두고 같이 입시 준비하던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간 적이 있었어요. 그곳 화장실에서 몰카 범죄를 당했어요. 그때 같이 있던 친구가 경찰이었고, 그 친구가 신고하려면 할 수 있다고 해서 결국 신고했어요. CCTV를 확인해 보니 그 술집의 직원이었고 베트남 이주민이었어요. 경찰이 와서 그 사람을 데려가고, 저는 피해자로 경찰서에 갔어요. 그런데 결정적으로는 그 사람이 몰카 촬영을 했다는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서 그 사건에 관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저는 경찰 친구도 함께 그 자리에 있고 했으니 상황이 나았지만 이런 경우에 가해자 측이 적반하장으로 행동하고 피해자가 주눅 들고 피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내가 변호사였더라면 이렇게 무력하지는 않을 텐데 싶었어요.
더 힘 있는 목소리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은 이미나 씨를 로스쿨로 이끌고, 힘겨운 로스쿨 생활을 버티게 한 강력한 동기였다. 그러나 서른이 넘어 시작한 로스쿨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가장 힘든 것은 사회에서 뒤처지는 느낌,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영영 정상적 삶의 궤도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불안이었다.
로스쿨 입학 성적이 낮은 편이어서 1학년 때는 정말 엄청 공부했어요. 2학년 때부터는 코로나19가 시작되었어요. 저는 원래 방에서 공부를 못하거든요. 그런데 학교에서 방역을 이유로 열람실을 닫아버렸어요. 3학년에게만 개방하고 2학년에게는 개방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학생들은 결국 스터디카페 같은 데로 갈 수밖에 없는데 학교만 책임을 회피하면 된다는 태도에 화가 났어요. 그때 친구들과 함께 담당 교수님을 찾아갔고 결국 열람실이 개방되었어요.
2학년 2학기부터는 너무 집중이 안 돼서 많이 놀았어요. 크리스마스 같은 날은 로스쿨도 분위기를 타잖아요. 그런 날은 괜히 휴게실에 모여 놀고 그랬죠. 3학년으로 넘어가면서 갑자기 성적이 폭락했어요. 공부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어요. 부모님은 성적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건강만 신경 쓰라고 하실 정도로 건강이 망가졌어요. 이석증이 생기고, 이명도 들리고, 스트레스로 잠을 못 자니까 항상 신경이 곤두서있고 근육이 경직돼서 두통이 생기고, 결국 신경안정제를 먹게 됐어요. 부모님이 그때 너무 걱정하셨어요. 늘 밝고 활기찬 아이였는데 정신과를 다닌다니 하면서요. 로스쿨에서 6월, 8월, 10월 모의고사를 치는데 저는 다행히 6월 모의고사 성적이 학교 졸업 기준을 통과할 정도로 나왔어요. 그때부터 마음은 약간 놓였지만 불안과 압박은 시험을 치는 순간까지 계속됐어요.
가장 힘들었던 건, 나이 먹고 학교에 들어가서 친구들은 결혼하고, 애도 있고, 회사에서도 대리급인데 나는 더 늦어지면 안 되는데, 나는 1년을 더 공부할 상황이 아닌데, 그런 사회에서 뒤처지는 느낌이었어요. 남들이 다 괜찮다고 해도 내가 괜찮지가 않았어요. 이런 삶을 하루빨리 청산하고 싶고, 삶이 너무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스트레스가 심한데도 그만둘 수 없었던 건, 여기서 그만두면 끝장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 같아요. 나는 더는 하고 싶은 일도 특별히 없는데, 여기서 그만두면 안 되고, 고시 낭인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이런 것들이 저를 너무 불안하게 했던 것 같아요.
2022년 1월, 이미나 씨는 제11회 변호사시험에 응시했다. 다가오는 로스쿨 졸업과 함께 한 시절이 마무리되었지만 여전히 미나 씨는 닥쳐오는 삶의 과제가 너무 많은 청년이다. 당장의 커리어에 관한 고민뿐 아니라 연애와 결혼 그리고 신앙까지, 서른넷의 한국 여성이 응답해야 할 질문은 끝이 없다.
로스쿨에 입학할 때 저는 서른한 살이었어요. 스물여덟에 로스쿨 진학을 결정하고, 스물아홉에 한 번 떨어지고 서른 살에 입시에 성공했어요. 부모님은 그때 싫어하셨어요. 나이 들어서 공부하는 건 안 된다는 게 아빠 생각이었고, 또 아빠는 항상 제가 결혼을 빨리 하기를 바라셨어요. 저도 로스쿨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자신은 없었지만 그때는 이미 놀 만큼 놀았고 이제는 내 분야를 찾아서 전문직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확고했어요. 저는 늦게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에 오히려 공부하기가 수월했던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인권 변호사가 되고 싶어서 로스쿨에 갔는데 제 한계를 느끼게 되는 체험도 했어요. 실무수습을 인권의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회원들의 후원금으로만 운영되는 공익인권 변호사단체로 나갔거든요. 사실 너무 좋았어요. 여기서 정말 우리 세상을 바꿔가는구나 싶어서 너무 좋았는데 한편으로는 돈에 쫓기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오히려 실무수습을 하면서 저에게 금전적인 부분이 무시할 수 없는 면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결혼은 하면 하는 대로,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다 고민이 있는 것 같아요. 20대 초반에는 학벌이나 키를 따져가면서 남자를 만났는데 그러다 많이 데였어요. 이상한 사람도 많이 만나고, 짧은 만남이 이어졌어요. 20대 후반에 너무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과 헤어지면서 다시 사람 만나는 게 어려워졌어요. 제가 연애하면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아니까 공부하면서는 누구를 사귀려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런 것도 다 일단 시험에 합격해야 고민할 수 있지 싶어요.
저는 여전히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너무 좋아요. 남미에서 여행하면서 매일 묵주기도하면서 정말 큰 위로를 받았고 그 기억이 너무 좋거든요. 그런데 솔직히 이제는 잘 모르겠어요.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성당에서 활동하면서 너무 실망스럽고 불쾌한 체험을 많이 했어요. 여성에 대해서 자주 말하지만 정말 여성들의 삶을 잘 알고 있는지도 의문이에요. 요즘은 성당에 발을 들여놓는 것조차 싫다는 느낌도 들어요. 신자들의 수가 아주 많이 줄어야 그제야 신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세상은 너무 많이 변했는데 사제들이 세상을 모른다고 자주 느껴요.
그래도 요즘도 항상 묵주반지는 끼고 있어요. 급할 때는 묵주팔찌, 기적의 메달까지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고요. 나는 여전히 가톨릭인가?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