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생 예나(가명) 씨는 교회 기관에서 일하는 청년 사목자이자, 세 살 아이의 엄마다.
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 예나 씨는 온 가족의 기도를 한 몸에 받고 기적처럼 살아난 아이였다. 사랑받는 데만 익숙했던 예나 씨에게 또래 아이들의 괴롭힘은 상처가 되었지만, 늘 더 나은 사람 그리고 좋은 엄마가 되고자 애쓰던 엄마는 어린 예나 씨를 단단하게 지켜주었다.
저는 1991년 1월에 경기도 연천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가 본래 연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전라남도 완도 출신이에요. 두 분은 서울에서 선으로 만났다고 해요. 어머니는 간호사였고, 아버지는 주로 공장을 설계하는 건축 설계사로 일하셨어요. 저는 태어날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어요. 생후 4개월 때 선천 장애로 심장 수술을 받고,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지냈어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저는 기적처럼 살아난 아이로 특별한 대우를 받는 손녀였어요. 남자 여자를 따지는 집안 분위기였는데도 저는 태어날 때부터 온 가족의 기도로 살아난 아이로 여겨졌고, 몸이 약하니까 다들 애지중지하셨죠. 농담처럼 하는 말이지만, 저는 장남같이 자란 ‘K-장녀’라고 그래요.
어머니는 섬을 떠나온 사람으로서 육지에서 성공하고 싶고, 뭐든 잘 해내고 싶은 마음도 있는 분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결혼하고 나서는 좀 차별받는 며느리였어요. 그래서 엄마는 시집살이에서 충족되지 못한 인정욕구를 저를 통해 많이 채우셨어요. 90년대에는 영어 유치원도 없었는데 저는 네 살 때부터 미국 선교사들이 영어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원에 다녔어요. 엄마는 세 남매를 키우면서 제가 8살 때 보험설계사 일을 시작하셨는데, 이달의 보험왕을 매번 안 놓칠 만큼 열정 넘치는 분이셨어요. 어머니는 늘 뭔가를 갈구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어요.
아빠는 엄마랑은 정반대로 내향적이고 삶에 변화가 많지 않은 분이세요. 저희가 어렸을 때 하던 컴퓨터 게임을 30년이 지난 지금도 하고 계실 정도로요. 친구도 별로 없고, 가족들과 여행 다니는 사람도 아니었고, 정말 일 끝나면 일찍 주무시고 새벽에 일어나서 정해진 취미생활을 즐기고 그런 고정된 루틴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제 눈에 아버지는 개인주의적이고 자기만의 세계가 지켜지는 것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자연스럽게 저희 육아도 거의 엄마가 전담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엄마의 영향을 참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아버지가 공장을 짓는 일을 하셔서 어릴 때는 이사를 많이 다녔어요. 우리 가족은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군산에 정착했고 바로 다음 해에 저는 초등학교에 진학했어요. 1월생이니까 일곱 살에 일찍 학교에 들어갔죠. 그런데 괴롭힘을 심하게 당했어요. 반 친구들에게 저는 동네에서 처음 보는 아이였고, 몸도 약했던 게 이유였다면 이유였겠죠. 어렸지만 괴롭힘의 수준이 꽤 높았어요. 집에서 귀하게 자라며 늘 자신감이 넘치던 아이가 학교에서는 얻어맞고 뭘 뺏기고 그런 생활을 시작한 거죠. 그러다 보면 점점 주눅이 들어가잖아요. 그런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엄마가 저랑 교환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제가 ‘수업도 재미가 없고, 친구들도 싫고, 학교 가기 싫다’며 불평을 늘어놓으면, 엄마는 칭찬과 격려가 가득 담긴 일기를 써서 다시 돌려주셨어요. 제 자존감을 높이려 애쓰신 거죠. 엄마와 일기를 주고받던 시간은 지금도 제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예나 씨는 자신의 청소년기를 중2병을 심하게 앓던 시절이라고 표현한다. 글쓰기를 좋아하고 감수성이 풍부했던 예나 씨는 영화감독을 꿈꾸며 대입을 준비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따돌림을 경험하고 친구들과 멀어지고 이런 과정이 쌓여서 중학생 때 약간 청소년기 우울증처럼 우울감이 심했어요. 친구들과의 관계도 늘 어려웠고요. 어떤 친구가 나를 미워하거나 싫어한다고 느끼면 그게 단순한 서운함을 넘어 본질적인 존재적 위협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사람을 갈구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경계를 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인 척하는 거죠. 초등학교 때부터 저는 마이마이를 늘 귀에 꽂고 대학생처럼 다녔거든요. 음악을 들으면서 학교 가는 길에 핀 장미꽃을 한참 바라보다가 1교시 수업에 늦고 그런 아이였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야기에 관한 시를 써서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고등학교 내내 백일장을 나갔어요. 그게 당당하게 학교를 땡땡이칠 기회기도 하잖아요. 시는 금방 쓰니까, 오전에 얼른 써서 내버리고 오후에는 혼자 영화 보러 가고 그랬어요. 아무도 없는 평일 낮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 합법적인 땡땡이를 즐기는 그런 재미가 있었어요. 좋아하는 과목만 열심히 하고, 온갖 백일장을 다 나가는 그런 애니까 저를 대하는 선생님들의 태도도 극과 극이었어요. 저를 진짜 싫어하고 부당하게 혼내는 선생님과 저를 편애하는 선생님으로 나뉘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주로 전교조 쌤들이 저를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국어랑 영어, 문학 과목을 좋아해서 나름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경쟁은 싫어했어요. 정확히 말하면 경쟁으로 인한 갈등이 생기는 걸 힘들어했죠. 모든 친구에게 나는 안전한 사람이고픈 마음이 있었어요. 학교에서는 성적에 따라 우등반을 운영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저는 그런 게 싫었어요. 공부를 곧잘 하면서도 아이들을 줄 세우는 제도에 반항심도 컸어요. 저는 치열한 경쟁 그런 건 언제나 좀 힘들어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고등학교 2학년부터는 학교 옆의 고시원에서 혼자 살게 됐어요. 그때는 공부할 때 PMP라고, 동영상 플레이어로 인강을 많이 봤어요. 근데 거기에 영화를 넣어서 보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그 무렵에 영화를 진짜 많이 봤어요. 그러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엄마가 교대나 가라고 그러는 거예요. 저희 부모님이 30대에 IMF를 겪은 세대잖아요. 교사가 제일 좋은 직장이라고 생각하셨던 거죠. 엄마는 저를 교사로 키우고 싶어서 과외 선생님도 교대생들로만 붙여줬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저는 교사가 적성에 참 잘 맞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때는 교대에 가라는 어른들에 대한 반감인지 교사만 아니면 된다는 마음이 컸어요.
영화감독이 되려고 영화과 입시 학원에 다니려는데 그런 학원은 서울에만 있었어요. 주말마다 그 학원에 가겠다니까 엄마가 조건을 걸었어요. 다가오는 모의고사에서 전교 1등을 하면 보내주겠다는 거예요. 두세 달을 하루에 3시간씩 자면서 공부해서 진짜로 문과 1등을 했어요. 그렇게 주말마다 서울에서 학원에 다니면서 영화과 입시를 준비했어요. 그런데 정작 대학은 영화과는 아니고, 영화감독이 많이 배출된 학교의 어문 계열로 가게 되었어요.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꿈꾸던 대학 생활을 시작한 예나 씨는 동경하던 삶에 자신을 던지며 스무 살을 만끽한다. 그러나 20대 초반 경험한 폭력은 예나 씨에게 깊은 우울과 염세를 남겼다.
제가 고3 때(2008년) 광우병파동으로 인해 촛불집회가 대규모로 일어났어요. 저는 수시 전형으로 일찍 대학에 합격해서 집회에도 열심히 나갔어요. 그때부터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많고 부당함이나 불의에 대해서 화가 많은 편이었어요. 대학에 와서도 신입생 환영회 때 선배들이 민중가요 부르고 가락에 맞춰 춤추고 그런 게 너무 멋있었어요. 그 선배들이랑 농활도 가고, 연대 현장 다니면서 술도 많이 마시고 그랬어요. 영화 동아리도 하고 학생회도 하고 대학 생활을 불태우다가 한 학기 만에 학사 경고를 맞으면서 입학할 때 받았던 장학금도 날아가 버렸어요. (웃음)
그러다 대학교 1학년 때 선배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학교생활이 완전히 무너졌어요. 그 때의 여파로 친구들과 연락도 완전히 끊고 휴학했어요. 복학 후에도 다시 학생회 활동을 미친 듯이 하면서 지내긴 하는데 속은 계속 곪아 갔어요. 내가 그렇게 꿈꾸던 대학 생활은 막 무너지고 있는데 겉으로는 잘 지내는 척하면서 누구에게도 제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이미 한번 잠수 탄 애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사람들 눈초리가 신경 쓰이기도 했고, 내 상황을 고백했을 때 내가 약자의 테두리에 갇혀서 피해자로 서게 되는 것이 두려웠어요. 그래서 늘 센 척을 했는데 사실은 그때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어요. 식이장애나 자해까지 이르는 심각한 수준으로요.
그때 아무 이유도 묻지 않고, 네가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이제 다시 좀 살아보려 했으면 좋겠다고 말해준 친구가 있었어요. 그때부터 심리 치료도 받고 다시 서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가깝게 지내던 언니가 캄보디아에 가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어요. 해외 봉사 프로그램이 인기가 높아져 가기 쉽지 않았는데, 좋은 기회기도 했고 제 상황의 돌파구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캄보디아에 갔어요. 사실 저는 그때도 기본적으로 염세적인 태도였어요. 같이 가는 친구들의 봉사 활동에 대한 로망이나, 선함에 대한 의지 이런 것도 속으로는 좀 우습게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캄보디아 사람들의 모습에서 조금씩 희망을 발견했어요. 전쟁으로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이 모여서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가는데 다들 너무 행복하게 살아가거든요. 두려움 가운데서도 서로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제 마음을 움직였어요.
캄보디아에서 돌아오고서는 자신감 있는 모습을 찾아가려고 애썼어요. 한 마디로 남들 사는 것처럼 나도 살아보자 그런 마음이었죠. 스펙도 열심히 쌓고, 취직 준비를 했어요. 영화감독이 되고 싶던 꿈은 이미 접은 상태였는데, 알바로 연출부 막내 생활도 하고 하면서 술담배에 쩔어서 나랑 잘 맞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그 틈바구니에 끼려고 노력하는 게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생각한 꿈을 이루는 장이라기도 보다는 좀 부조리한 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되도록 현장을 떠나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굳혔어요. 그러다가 그 생각도 잠시 접고 영화 기획이나 방송 쪽으로 진로를 잡고 남들 하는 대로 공부하고 취업 준비하고 그랬죠.
남들처럼 살아보겠다는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기업 취업을 준비하던 20대 중반의 예나 씨는 훌쩍 캄보디아로 떠난다. 캄보디아에서 보낸 2년은 외로움도 기쁨도 모두 안겨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는 자기 자신 그리고 하느님과의 화해의 시간이 되었다.
졸업 학기에 어느 대기업 원서를 넣고 최종 면접까지 가게 되었어요. 면접 특강을 듣는데 강사분이 면접에서는 자기 생각이 아니라 조직이 원하는 생각을 말하는 걸 잊지 말라고 팁을 주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마치 경전처럼 가슴에 안고 면접에 가서 내가 얼마나 회사가 원하는 인재인지 증명하는 하루를 보내고 면접비 5만 원을 받아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그날 저녁 지하철 안에서 느꼈던 온도와 습도, 햇살 그 모든 것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그때 마음이 사실은 되게 허탈했던 거죠. 그런데 그날 지하철 안에서 캄보디아 부동산 투기 광고를 봤어요. 그 순간 단전에서부터 분노가 일었어요. 이 세상이 젊은 사람들의 영혼을 죽이는 걸 넘어서 내가 유토피아라고 믿었던 곳까지 훼손하려 드는구나, 뭔가 잘못됐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그날 밤에 캄보디아로 연락했어요. 사실 거기 담당자로 계신 신부님은 저를 기억조차 못 하고 계셨어요. 왜 오려는지도 모르겠고, 네가 와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그러셨죠. 그런데 저는 마치 대기업 면접 때 그랬던 것처럼 뭐든 잘할 수 있다고 열심히 어필했어요. 절박해 보였는지 없던 직책을 만들어서 한번 일해보자고 초대를 해주셨어요. 정작 캄보디아에서 생활은 쉽지 않았어요. 거기서는 신부님들, 수녀님들, 봉사자들 다 같이 공동체 생활을 하거든요. 살면서 애써 만들어왔던 모든 습(習)이 같이 살다 보면 다 뽀록나는 거죠. 수도자들과 함께 사는 일상에서도 종종 차가움을 느끼기도 했어요. 다들 자기 일에 무척 지쳐있고, 좀 외로워 보였어요.
캄보디아에서 배운 건 억지 노력은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거예요. 처음 거기 가서 자꾸 뭘 열심히 하려고 했어요. 뭔가 해내고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주변에서 “좀 놀아, 뭘 자꾸 하려고 해” 그런 얘기를 했어요. 제가 2년쯤 머물면서 보니까 특히 한국에서 온 청년들이 꼭 뭘 하려고 해요. 나중에는 그 말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그 말이 충격이면서 해방이었어요. 저는 홍보부서에서 일했는데, 캄보디아 말을 빨리 배워서 여러 현장에 인터뷰를 많이 다녔어요.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 가뭄이나 수해 피해자들을 만나러 비포장도로를 달려서 캄보디아 시골 곳곳을 다녔어요. 그 경험이 너무 좋았어요. 순수한 사람들에게서 오는 행복감, 가난함에 대한 동경을 느끼면서 치유 받는 시간이었어요.
저는 유아 세례를 받고 성당에서 쭉 자랐지만, 고등학생 때부터 꽤 오래 냉담했거든요. 그런데 처음 캄보디아에 짧게 다녀갔을 때 절에서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분들을 봤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다시 기도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한국에 돌아가서 다시 성당에 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저는 농담으로 절에서 회심했다고 그래요. 다시 캄보디아에 와서는 공동체 생활을 통해 전례가 삶의 일부가 되었고 서서히 신앙과 저 사이의 화해와 회복도 이루어졌어요.
캄보디아에서 2년간의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모교 교목처에서 사목 스태프로 일하게 되었어요. 신앙심도 부족한 내가 사목자가 될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홍보 업무를 하면서 동시에 캄보디아 사람들을 만났던 것처럼 학생들과 만나면 된다는 초대에 학교로 돌아오게 되었죠. 전례와 사목을 일로 했던 교목처에서 2년이 제 신앙을 많이 키워주었어요. 제가 오랫동안 아프게 머물렀던 대학 시절을 그때의 저처럼 힘겹게 지나 보내는 학생들을 동반하며 제 상처와도 화해하는 체험을 하기도 했어요. 어쩌면 그 시절에 만난 청년들은 제가 되게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오히려 저는 그 시절에 신앙이 생겼다고 할 수 있어요.
하느님과의 화해, 하느님을 더 알고 싶은 갈망은 예나 씨를 평신도 협력자의 삶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캄보디아에서 이미 성직자들과 더불어 살며 함께 일했던 예나 씨에게 교회 안에서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일상은 여러 의미에서 새로운 도전이기도 했다.
돌아보면 저는 세상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하는 두려움이 늘 족쇄처럼 느껴졌어요. 자유롭지 않았던 거죠. 그런데 자유를 느끼고 해방감을 맛보고 사랑으로 채워졌던 순간들이 캄보디아에서 시작되었고, 나라는 사람이 다시금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을 준 것에 대한 감사함이 컸어요. 나를 살린 데 하느님의 개입이 있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영신수련을 통해서 하느님을 좀 더 깊이 만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고민하던 중에 지금 일하는 수도회 기관에서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그때 저는 바로 일을 시작하기보다 30일 피정을 꼭 하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영신수련 피정을 먼저 다녀오고 입사하게 되었어요.
수도회에서 일하면서 느낀 건 평신도와 성직자가 같은 사명 안에서 협력한다는 게 아직은 모두에게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일이구나 하는 점이에요. 수도회의 삶이라는 건 그 나름의 규칙이나 영성 안에서 이뤄지는데 평신도는 노사관계 같은 새로운 부분이 들어가니까 더 어려워지기도 하고, 사람마다 수도회 영성에 대한 이해도나 직장에 대한 기대가 각자 다르기도 하고요. 다양한 차원의 관계가 섞여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잘 협력해 나갈지 쉽지 않다고 느껴요. 저는 캄보디아에서 공동체 생활과 사도직 활동을 경험해 봤으니까, 캄보디아에서는 가능했던 일이 한국에서는 참 어렵다고 느낄 때도 있고요. 캄보디아에서는 평신도 지도자가 이끄는 피정에 신부님, 수사님들과 참여하거나 평신도가 리더인 기관에서 신부님들이 함께 일하는 게 자연스러웠거든요. 한국에서는 아직 좀 어렵죠.
지난 몇 년을 돌아보면 오히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일하고 있는 평신도 협력자들이 영감을 많이 주셨어요. 이분들 한분 한분이 자기 역할에 되게 진심이구나 알게 되면서, 신부님들이 더 중요한 일을 하시도록 나는 돕겠다는 그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이 멋지다고 느꼈어요. 본부에서 행정 업무를 하는 선생님들, 공동체에서 식복사로 일하는 자매님들과 만나면서 교회 안에서 일하는 여성들에 대한 연대감을 느꼈어요. 그리고 그들이 멋있어 보이는 만큼 그 안에 속한 나를 더 귀하게 여기고 싶은 마음도 커졌어요. 이분들 덕분에 이곳에서 오래 일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된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서 일하는 여성에 대한 높은 기대도 느껴요. 능력은 있는데 겸손해야 하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옆에 있는 사람을 드러내 주어야 하고, 신앙심도 깊고 가난하면서 청렴해야 하고... 뭔가 완벽한 사람을 원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제가 이런 기대에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되 겸손하게 하느님의 도구로 쓰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많이 했어요. 나는 특정한 누군가, 어떤 신부님을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명 안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어요.
결혼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예나 씨는 서른이 되던 해에 결혼했고, 바로 아이가 생겼다. 또래와 비교해 일찍 엄마가 된 예나 씨는 너무 좋은 엄마가 되려고 애쓰지 않으면서 일과 육아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두 사명을 다하고 있다.
저는 제가 여성이기 때문에 결혼하는 게 두려웠어요.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결혼으로 어떤 특정한 프레임에 갇힐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컸어요. 그래서 한때는 수도 성소를 고민하기도 했어요. 그때의 저는 수녀회가 같은 지향을 품은 여성들끼리 살아가는 공동체니까 더 이상적이고 자주적이라고 느꼈어요. 그렇다고 제가 엄청난 페미니스트냐면 그것도 아니에요. 가부장제에 너무 절여져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위축이 많이 되어있었던 사람이에요.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지금 남편은 캄보디아에서 만났어요. 연애하면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제가 인생에 관해서 좀 관대해진 면이 있어요.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구나! 그런 생각도 들고, 흘러가는 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귀한가 그런 걸 느낀거죠. 내가 결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도 혹시 불행할까 봐, 그러다 이혼하게 될까봐 그런 두려움이 앞서서 그런 거였더라고요. 삶의 선택 앞에 무엇이 은총이고 무엇이 함정인지 모르지만, 수많은 함정을 겪더라도 내 인생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졌어요. 그러다 강아지를 한 마리 입양하면서 남자친구가 많이 도움을 주었고 어느새 생명 하나를 중심으로 삶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더라고요. 일상을 나누다 보니 결혼을 얘기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결혼을 결심했어요.
결혼하고 바로 아이가 생겼어요. 허니문 베이비가 생기니까 아이가 선물처럼 왔구나 싶으면서도 이제 내 인생은 어쩌지 싶은 두려움도 컸어요. 아이를 품고 있으면서는 나의 약함에 관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실제로 몸도 많이 약해졌고 입덧도 심했고요. 또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 작은 태아를 지켜내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공포가 생각보다 크더라고요. 남편도 알 수 없는 오직 나만 느끼는 이 감정을 유일하게 함께 겪는 존재가 아이였죠. 두려움 가운데서도 아이와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이 제게 힘을 주는 기적 같은 체험이었어요. 저는 출산도 어렵게 했어요. 오랜 시간 진통 끝에 생명을 세상에 오게 한 게 자랑스럽고 뿌듯한 그런 승리감이 있었어요.
아이가 신생아일 때는 이유 없는 우울감이 있었어요.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생각한 게 너무 완벽한 엄마가 되지 말자는 거예요. 그래서 제 생활도 중요하다는 마음으로 모유 수유를 3개월 정도에 끊기 시작했고, 7개월 차부터는 어린이집에 보냈어요. 9개월 차에는 복직도 했고요. 완벽하고 좋은 엄마가 되기보다는 늘 일관된 사랑을 주는 엄마가 되려고 애쓰고 있어요. 제가 누구나 꿈꾸는 부자이고 늘 집에 있고, 항상 예쁘고 그런 드라마에 나오는 엄마는 절대 못 될 거예요. 하지만 아이가 그런 부분에서 결핍이 생길까 두려워하는 엄마가 아니라 아이가 결핍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삶을 단단하게 이어갈 수 있는 든든한 힘줄을 만들어주는 엄마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까 늘 두려웠던 예나 씨는 아이와 만나면서 한결 자유로워졌다. 사명을 따르는 삶에 이끌렸던 예나 씨는 이제 주어진 역할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며 사는 삶을 향해 바쁜 일상을 채워나가고 있다.
엄마가 된다는 것도 어쩌면 일하는 삶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나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지금 저에게 주어진 사명 가운데 우선순위는 물론 엄마로서 역할이지만, 필요한 순간에는 꼭 엄마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제 일도 해나가고 있어요. 얼마 전에 한 달 동안 해외 출장을 다녀왔는데 주변에서는 다들 경악했죠. 두 살배기를 두고 어떻게 그러냐고. 실제로 돌아왔을 때 아이가 약간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책임지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으면서도 엄마는 꼭 돌아온다는 것을 알려줬어요. 아이는 금세 받아들이고 또 자라나가요. 제가 할 수 없는 역할은 또 다른 어른들이 채워줄 것이라고 믿기도 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아이의 세계도 더 넓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워킹맘의 삶이 다 그렇듯 육체적으로는 많이 지쳐요. 삶의 질도 떨어지고, 시간도 늘 부족하고.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요. 오히려 힘이 많이 되죠. 아이를 키우면서 나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관점도 넓어진 면이 있어요. 육아가 생각보다 인간을 많이 보게 하는 과정인 것 같아요.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제 삶을 관통하는 이야기들, 제 상처나 결핍에 관한 얘기를 잘 안 했어요. 제 약함이 드러나는 것이 두렵고, 나를 약자로 규정하는 게 될까 봐서요. 그런데 아이와 만나면서 뭔가를 숨기거나 꾸미지 않아도 나 스스로가 그대로 완벽하다고 느끼는 체험을 했어요. 그래서 지금부터는 제가 주어진 역할들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목표예요. 그리고 그 과정이 늘 똑같지 않기에 늘 설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