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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경계 너머, 가장 다정한 것들

2024년 5월호 경향잡지
며느리가 되려고 결혼하는 사람은 없다
여느 가족들처럼 우리 집도 봄에 가족 행사가 많은 편이다. 아버지 생신, 어버이날 그리고 지난해 결혼하고 나서는 시아버지 생신도 추가되었다. 결혼하기로 하면서 각자의 부모님은 알아서 챙기자는 다짐 아닌 다짐을 했지만, 현실이 꼭 생각처럼 흘러가지는 않는다. 누구도 나에게 섣불리 ‘며느리 도리’같은 말을 꺼내 들지는 않지만, 남편이 아닌 나에게 오는 시어머니의 전화에서, 시댁에는 가끔 들리냐는 엄마의 재촉에서, 모두가 함구하지만 이미 모두의 마음 안에 새겨진 ‘그 도리’의 냄새를 맡는다.
“며느리가 남자라니!” 2007년 동성 커플이 등장하는 TV 드라마가 방영되자 이를 반대하는 측에서 일간지 1면에 게재한 광고 문구다. 이 강렬한 문장은 반동성애 운동의 대표 구호로 자리 잡아, 요즘도 퀴어 퍼레이드 반대 집회에 어김없이 등장한다. 김지혜 교수는 그의 저서 「가족 각본」에서 며느리가 어떻게 남자일 수 있느냐는 말이 자극하는 감정은 가족 질서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지적한다.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 며느리가 들어오기를 바라는 주체, 그 며느리가 반드시 여자이기를 바라는 주체는 가부장적 가족 질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며느리 된 입장에서 ‘남자가 며느리로 올 수 있다’는 협박이 흥행하는 현실은 솔직히 좀 섬뜩하다. 이 협박은 남자 며느리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남자에게는 며느리 도리를 강요할 수 없다는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협박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유로 남자 며느리를 드는 사람들에게 가족은 혈족과 인척 관계 안에서 사람의 순서를 매기고 부양의 의무를 부여해온 체계다. 가족이 해체되고 있다는 선언이 그 다급함에도,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은 이유는 기존의 가족 질서 안에서 행복한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내 가족을 묻지 마세요
아예 가족에 관해 서로 묻지 말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남의 가족관계를 물어보거나, 이력서에 가족관계를 쓰도록 하는 게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혼모, 한 부모 가정, 이혼 가정 등 이른바 ‘정상가족’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배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가족구성권연구소 대표 김순남 박사는 「가족을 구성할 권리」에서 ‘정상가족’이라는 신화는 어떤 가족이 ‘위기 가족’인지를 지속적으로 말하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기존의 가족 질서의 경계를 넘는 존재들을 ‘근본 없는 존재’로 간주하는 일종의 낙인찍기를 통해 무엇이 ‘정상’인지를 비로소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혈연관계의 핵가족으로 상징되는 ‘정상가족’ 신화는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2021년 9월 기준 행정안전부 통계에 따르면 1인 세대는 이미 전체 가구 수의 40.1%를 차지하며 한국 사회에서 가장 다수의 가구 형태가 되었다. 1인 세대 다음으로는 2인 세대가 23.8%를 차지했으며 4인 이상 세대와 3인 세대가 그 뒤를 이었다. 1인 또는 2인으로 구성된 세대 비중의 합계는 63.9%로 절반을 훌쩍 넘었다. 주택 청약이나 부양의무자 기준 등 한국의 복지 정책은 여전히 3~4인 세대의 핵가족 위주로 마련되어 있지만, 현실은 이미 제도를 앞지른 상태다.
이처럼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로 구성된 혈연관계로서 핵가족이 정상가족의 이상이라면, 이미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정상에 속할 수 없는 존재들이 다수가 되어 살아가는 세상이다. 정상가족에 속하지 않는 형태의 가족을 배제하거나 동정하는 대신 다양한 가족을 상상하고 또한 긍정하는 노력이 필연적인 이유다.
가족을 다르게 상상하기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어 생각하던 기존의 혈연 중심 가족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여러 연구자가 새로운 가족 모델을 제시한다. 페미니스트 지리학자 소피 루이스는 가족의 대안적 모델이 필요하다는 입장 역시 비판하며. 대안 가족은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가족’ 모델 자체가 대안을 가로막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가족보다 더 날카로운 개념, “동지적 관계”로서 혈연과는 무관한 의존과 필요와 지원의 구조를 구축하면서, 기존에는 혈연관계 속에서만 기대되었던 돌봄, 나눔, 사랑을 나누는 동지가 되는 실천에 나서자고 제안한다.
가족을 ‘누구를 가족으로 여기게 되는지를 구성하는 활동 (Family Practice)’로 보자는 주장도 있다. 가족의 규범을 고정된 형태로 정해두고, 그에 맞지 않는 관계를 배제하거나 바꾸려 들지 말고, 친밀감을 표현하고 돌봄을 실천하는 방식과 관계를 가족으로 바라보자는 제안이다. 김희경 전 여성가족부 차관은 「이상한 정상가족」에서 이를 “이제 가족은 상태보다는 활동, 명사보다는 동사”라고 부연한다. 주디스 버틀러 역시 생물학적인 것과 무관한 가족 관계가 존재한다고 본다. 삶의 재생산과 죽음에 연루되는 다양한 실천적 관계의 모델로서 가족을 상상한다면 상호의존적 삶의 관계망 또한 가족으로 볼 수 있다는 해석이다.
이처럼 혈연을 넘어 서로를 실질적으로 돌보고 보살피는 관계로서 전통적인 ‘가족’의 의미를 넘는 다양한 관계들에 주목하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이 같은 주장에 보편적으로 등장하는 개념은 ‘실천’이다. 서로를 돌보고, 보살피는 존재로서 실천이 따르는 관계는 혈연과 무관하게 가족이 될 수 있으며, 혈연이라고 하더라도 돌봄, 나눔, 사랑이 부재하다면 이는 실천적 의미에서 가족이라고 보기 어렵다. 가족 개념을 확장하고 더 나아가 대신하려는 이런 시도는 권위적인 통제의 체계로 기능했던 기존의 가부장적 가족 질서와 이른바 비정상으로 낙인 된 존재들을 차별하고 배제해왔던 정상 가족 신화에 대한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반드시 핏줄로 오지 않는, 가장 다정한 것들
도나 해러웨이는 「트러블과 함께하기」라는 자신의 책에서 “가장 다정한 것들이 반드시 핏줄로 엮인 친척”은 아니라고 말한다. 태생에 의한 연결과는 무관한 존재들의 돌봄은 예기치 않게 만난 존재들이 협력하고 결합하는 삶, 인간 존재를 넘어 다양한 피조물과 상호 공존하는 삶으로 확장된다. 해러웨이는 두터운 현재 안에서 함께 잘 살고 죽는 것을 배우는 실천으로서 ‘기이한 친척 만들기’를 제안한다.
자식이 아닌 기이한 친척을 만들어 나가자는 해러웨이의 주장은 다분히 불온하다. 인구 절벽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도 충분히 문제적이나, 가정을 결혼으로 결합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자녀를 낳아 구성하는 하느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단위로,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가족의 주된 성립 목적 가운데 하나로 보는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앞서 인용한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의 확장된 가족 개념 역시 분명 가톨릭교회의 가정에 관한 가르침과는 양립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가족의 이상이 충분히 돌보지 못한 배제된 존재들에게 돌봄의 실천으로서 새로운 가족 개념을 상상하자는 제안은 여전히 복음적일 수 있다고 믿는다. 무엇보다 교회는 태생부터 혈연이 아닌 믿음으로, 함께 나누는 가치로 더불어 살아감을 실천한 대안적 공동체였음에 주목하고 싶다. 사회적 결속과 지지에 친족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를 살았으나, 예수님과 제자들의 공동체는 혈연과는 무관한 돌봄, 나눔, 사랑을 베푸는 가족의 이상을 이미 실천했다. 당대의 기준에서 이들은 모두 정상적 삶의 궤적에서 이탈한 존재들이었을 것이다.
기존의 가족 질서 안에 상처받고, 고통받은 이들에게 가장 따뜻한 것은 반드시 핏줄로 오지 않는다는 통찰은 분명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게다가 혈연을 뛰어넘어 자유롭고 평등하게 서로를 존중하고 돌보는 공동체는 교회의 전통과도 멀지 않다. 결혼하지 않고 수도자가 되어 공동체의 삶을 일구며,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는 삶 역시 가족 제도를 통해 체제를 유지하는 제국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문제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질서에 저항하고, 대안적 공동체를 이루어 돌봄과 나눔을 실천해 온 오랜 전통에서 가족의 경계 너머, 비로소 가장 따뜻한 것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