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생 김세진 씨는 자신의 세대를 “많은 것들의 마지막 세대”라고 정의한다. 서른여섯 세진 씨는 노동 문제를 연구하는 청년 연구자이자 인천에서 마포로 매일 출퇴근하는 인천시민이기도 하다.
세진 씨는 대구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자랐다. 세진 씨는 자신의 부모님을 “숟가락 두 벌로 시작해서 자수성가하신 분들”이라고 소개한다.
우리 집은 좀 시대를 앞서나가는 집안이에요. 아버님이 57년생이신데, 어머님이 55년생이세요. 어머니가 연상이시죠. 어머님은 고향이 백령도예요. 어머니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모두 일찍 돌아가셔서 어린 나이에 생업에 뛰어들어 열심히 일하며 사셨어요. 여성 노동자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여다보며 저는 우리 어머니가 대표적인 여성 노동자였다고 생각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공장에 나가고, 장사도 하고 그러셨거든요. 옛날에는 산업체 부설 고등학교가 있었으니까 거기서 학교를 마치기는 했지만 ‘나의 삶’ 없이 가족을 위한 삶을 계속 살아오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인천에서 태어나 할아버지 사업을 따라 대구, 부산 등에서 자라셨어요. 아버님 가족은 지금으로 치면 호텔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에서 꽤 큰 여관을 하셨다고 해요. 그런데 대학을 휴학하고 군대를 다녀오니 으리으리했던 집이 방 한 칸으로 바뀌어 있었대요. 할아버님 사업이 망하면서 아버지는 제대하고 이틀 만에 아파트 짓는 공사장으로 가셨어요. 그래서 결국 대학도 못 마치셨죠. 어떻게 보면 두 분은 지금까지 계속 일만 하는 인생을 살아오셨어요.
두 분은 어려운 상황에서 만나 아무 가진 것 없이 가정을 이루셨어요. 처음에는 대구 산격동 단칸방에서 시작해 제가 여섯 살쯤 인천으로 오셨어요. 처음 인천에서 살았던 집은 가끔 비가 새는 반지하였어요. 어릴 때 침대에 누워 위를 올려다보면 창문 밖으로 애들이 놀고 있는 것이 보였어요. 그래서 저는 영화 <기생충>을 보면서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어요. 그런데 사실 그때가 되게 행복했어요. 요즘 일어나는 아동학대 사건 같은 게 모든 보육의 책임을 부모에게 전가하면서 더 심해졌다고 느끼거든요. 반면에 저는 복 받았던 게 동네 어른들이 저를 같이 키워주셨어요. 어머니가 어디 가면 저는 자연스럽게 옆집이나 다른 집에서 하루 자는 거였고, 배고프면 그냥 다른 집에서 밥 얻어먹을 수 있었어요. 다른 집 아이들도 우리 집에 와서 밥 먹고 가고, 그런 기억이 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게 공동 육아죠.
외동아이로 자랐지만 저는 외롭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부모님은 외아들이어서인지 항상 더 각별하게 챙기고, 제가 어디서든 당당하길 바라는 마음이 크셨어요. 그래서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도 좋은 옷, 좋은 신발 이런 것도 많이 챙겨주셨고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는 조금 걱정되는 건 있어요. 아버지 어머니도 나이가 들어가시니까 내가 돈도 좀 잘 벌고 해야 더 잘 보살펴 드릴 텐데 그런 생각. 어머니는 요즘도 가끔 “공무원 시험 볼래?” 이런 얘기를 하세요. 안정적인 삶을 살았으면 좋겠는데 저놈은 대체 이상한 것하고 다니고 그렇게 걱정하시는 거죠. 또 한편으로는 제가 만약 유학 간다거나, 수도회에 입회한다거나 그런 선택이 좀 힘들더라고요. 부모님 두 분만 두고 가야 하는 건데 그게 마음에 좀 걸리는 건 있어요.
세진 씨는 청소년기의 자신을 다소 ‘재수 없는 모범생’으로 회고한다. 공부도 잘하고, 학교생활도 충실했던 세진 씨는 기대받고, 성취하는 것이 중요한 아이였다. 그러나 순응적인 모범생이었던 그는 스무 살 무렵, 어린 시절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어른의 문턱에 들어선다.
저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기대를 많이 받는 아이였어요. 공부도 잘하고 선생님이 죽으라고 하면 죽을 수 있는 그런 아이였어요. 친구도 많지 않고 약간은 친구들보다 내가 더 나은 사람 같은, 더 잘난 줄 아는 그런 게 있었어요. 돌아보면 그때의 저는 좀 폭이 좁았던 것 같아요. 너무 얌전하게 살았다고 해야 하나. 그때 좀 꾸미기도 하고, 놀아보기도 하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죠. 지금 생각해보면 공부를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니었는데, 오히려 뭔가 성취하는 걸 되게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건 기대를 받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기대받는 사람이라는 것에, 제 효능감을 느꼈어요. 외아들이어서 어릴 때부터 가족들과 친척들의 관심을 받다 보니 기대받고, 인정받는 게 저한테는 중요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3학년 때 가까웠던 친구가 죽었어요. 제가 반장이고 그 친구가 부반장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학교도 잘 안 오고 좀 이상하더니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어요. 장례식장에 그 친구 사진이 걸려있는데 그때는 현실감이 없었어요. 그런데 막상 장지에 가는 길에 학교에 들른 영구차를 보고, 제가 막 울었어요. 저는 잘 우는 사람이 아닌데. 그 이후에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맞나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마음을 못 잡고, 공부도 손에 안 잡히고 하면서 성적도 떨어지고 결국 재수했어요.
그렇게 제 스무 살은 잿빛이었어요. 이게 문학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해 뜨기 전에 학원에 가서 밤이 되어야 집에 오니 세상이 온통 회색이었죠. 저는 항상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고, 기대받는 학생이었으니까 그때는 좀 좌절이었어요. 내가 재수를 할 줄이야. 그래도 그때까지는 학원 생활도 학교생활처럼 열심히 했어요.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아주 협조적이고. 그런데 어느 날 이게 맞나 싶은 순간이 왔어요. 저는 고등학교도 상당히 폭력적인 곳을 다녀서 선생님에게 맞는 게 익숙했지만, 재수학원은 나이가 다 든 성인도, 여성들도 있는데 교사들이 수험생이 잠시 졸았다는 이유로 끌고 가서 막 때리는 거예요. 중고등학교라는 작은 세계에서 벗어나 조금씩 시야가 넓어지니까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돌아보면 그 무렵이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였어요. 중고등학생 때 나는 되게 순응적인 모범생이었다고 말하면 대학 이후의 친구들이 안 믿어요. 대학 시절부터 저는 항상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었거든요. 수동적이고 말 잘 듣는 아이로 살던 사람이 친구의 죽음과 재수 생활을 겪으면서 상당히 비판적인 사람이 되었던 거죠.
세진 씨는 고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15여 년을 가톨릭 학교에 다녔다. 군대 또한 군종병으로 다녀오며 신앙생활은 세진 씨의 청년기를 지탱한 중심이었다.
세례는 6살 때 인천에서 받았어요. 어머니는 어린 시절 백령도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오랫동안 냉담하다 저를 데리고 다시 성당에 가셨어요. 아버지는 뒤늦게, 제가 성인이 되고 받으셨고요. 그런데 정작 맞벌이로 바빠지면서 성당을 못 나간 시간이 꽤 길었어요. 그래서 저는 제때 첫영성체를 못 했어요. 좀 특이한 케이스죠. 나중에 중학교 2학년 때 따로 교육받고 첫영성체를 했어요. 고등학교부터는 꼭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대학교도 대학원도 내내 천주교 학교만 다녔고, 군대도 군종병으로 다녀왔고, 친구들도 왠지 다 천주교 신자예요.
재수하던 시절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정신적으로 텅 빈 상태였어요. 내가 생각했던 스무 살의 모습과 그때의 내가 너무 다르기도 했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세상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았죠. 그 무렵에 주보에서 예수회 성소 모임 홍보를 보고 찾아가기도 했어요.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일종의 해방구로 성소 모임을 찾았던 것 같아요. 대학교 1학년 때까지 다녔는데,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 그때 같이 성소 모임에 나오셨던 분들은 입회해서 벌써 몇 년 전에 사제품 받으셨어요. (웃음) 본당 활동도 열심히 했는데, 사실 저를 좀 부려 먹었어요. 너는 앞으로 청년 회장감이니까 일을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니 하는 게 있었는데 힘들었죠. 재수 생활을 하는 중이기도 했고 분위기도 좀 강압적이었어요.
그러다 제가 대학교에 들어가서 교목실 활동하면서 문제가 생겼어요. 입학하고 얼마 안 지나 부활절인데, 본당 청년회냐 학교 복사단이냐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어요. 그때 본당은 제가 없어도 잘 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학교생활은 막 시작한 시점이니까 학교를 선택했어요. 그런데 그다음 주에 청년회장이 불러서 갔다니 막 욕을 하더라고요. 욕만 했으면 모르겠는데 저를 때렸어요. 그때 심하게 맞았어요. 지금 같으면 바로 병원 입원하고 진단서 끊고 변호사 찾고 그랬을 텐데, 그때는 스무 살이니까 그런 건 또 무서웠죠. 어머니 아버지 아시면 안 되고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맞다가 너무 아프니까 의자를 집어던지고 그냥 나왔어요. 그리고 그 본당을 제가 10년 동안 안 나갔어요. 가기가 싫더라고요. 만약 제가 천주교 학교에 다니지 않았으면 바로 냉담했을 것 같아요. 학교가 나를 좀 잡아준 게 있죠.
대학 시절 세진 씨는 세 개의 전공과 교목실, 학보사, 학회에 오가며 폭넓은 대학 생활을 경험한다. 어린 시절부터 사회와 정치 문제에 관심이 깊었던 세진 씨는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자신의 진로를 찾아 나갔다.
저는 어렸을 때 장래 희망이 정치인이 되는 거였어요. 지금은 다 부질없는 얘기지만요. (웃음) 기본적으로 사회나 정치 현상에 관심이 많았고, 사회 관련 과목을 좋아했어요. 지리, 역사, 정치, 윤리 이런 과목을 좋아하고 잘했어요. 반면에 수학은 잘 못 했고 문과적인 사고를 한다고 할까 그런 게 확실히 있었죠. 정작 저희 친가는 기반이 TK고, 외가는 실향민이셨으니까 가족들의 정치적 분위기는 진보적일 수가 없었어요. 어렸을 때는 저도 거기 갇혀있기도 했어요. 박정희 대통령, 전두환 대통령 위대하신 분 막 이렇게요. 점차 자라면서 보니 반대쪽 말도 일리가 있는 거예요. 왜 이렇게 서로 생각이 다른지 생각해보면서 시야가 넓어졌어요.
막상 재수하면서는 문학평론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국문학과에 갔어요. 그리고 정치외교학과를 복수전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제가 다닌 학교에는 정외과가 없어서 결과적으로는 전과, 복수전공으로 중국학, 중어중문학, 국어국문학 3개를 전공했어요. 전공을 3개나 하고 4학년 때는 대만 교환학생을 다녀오느라 남들보다 대학을 1년 더 다녔어요. 전공만이 아니라 동아리도 1학년 때는 6개를 들어서 주말마다 MT를 가는 연예인 스케줄로 살았어요. 근데 그러다 내가 죽겠구나 싶더라고요. 결과적으로는 교목실, 학보사, 국제학회 3개만 남기고 정리했어요. 지금이라면 다 접고 주식이랑 운동을 할 텐데요. (웃음)
대학 시절에 한 가지 기억나는 사건은 2008년에 광우병 소고기에 반대하는 시위가 대규모로 있었잖아요. 사실 저는 거기서 “뭘 합시다” 그렇게 나선 적은 없었어요. 그런데 한번은 광화문에 책을 사러 갔다가 갇혀 버린 적이 있어요. 전경들이 시위대가 나가는 길을 터줘야 하는데 그냥 막아버리더라고요. 9시가 딱 되니까 경고 방송이 나오고는 물대포를 쏘기 시작했어요. 이미 책은 어디 갔는지도 모르겠고 물대포를 맞았어요. 그리고 서울 서부 경찰서 유치장으로 연행됐어요. 저는 갑자기 철창 속에 갇혀서 공황 상태였어요. 당시에 같이 연행된 분들이 애가 좀 이상하니까 왜 그러냐고 물어오고, 다 같이 항의를 해줬어요. 결국 저는 새벽에 훈방되긴 했는데 그게 굉장히 트라우마로 남았어요. 또 한편으로는 좀 더 깊이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는 계기가 됐어요. 그때 물대포를 맞은 등에 피멍이 들었거든요. 2015년에 백남기 농민이 머리에 물대포를 맞았을 때 저는 바로 알겠더라고요. 그리고 내가 조금만 위로 물대포를 맞았으면 나도 쓰려졌겠구나 싶었어요.
2009년 2월 세진 씨는 군종병으로 입대한다. 국군수도병원에서 원목으로 보낸 남들과는 조금은 다른 군 생활 끝에 제대한 세진 씨는 좀 더 어른이 되었지만, 좀 더 꼰대가 된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2009년 2월 23일에 입대해서 기초 군사 훈련받고 병원에서 군 생활을 했어요. 병원 안의 성당에서 신부님을 돕고, 환자들이 오면 맞이해주고, 상담해주고 그런 일을 했어요. 2010년 연평도 포격 때 기억이 많이 나요. 병원 한쪽에 분향소가 차려졌는데 그 무렵이 부활 주간이었어요. 성주간을 보내느라 너무 바쁜 와중에 당시에 구조하러 가신 대원 한 분이 돌아가시고 국군수도병원에서 장례를 치렀어요. 조문하러 온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상황이었죠. 당시에 성당 사정도 열악했지만 조문하러 온 해군 특수전전단 대원들이 잘 곳이 없다고 해서 성전을 내어줬어요. 덮을 것도 없고 해서 죄송하다고 성당 의자에서 주무셔도 된다고 하니까 그분들이 “우리 이런 데서 잘 자요” 하고는 잘 주무시더라고요. 그날이 성 목요일이었어요. 성체를 유아방 이동 감실로 옮기고, 성전에는 대원들이 누워있는데 이곳이 갈 곳 없는 사람들의 안식처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병원에는 사실 할 게 마땅치 않거든요. 그런데 성당에 유일하게 닌텐도 위 게임기가 있었어요. 그걸 하러 사람들이 많이 왔었어요. 사람들이 놀러 오면 하고 가시라고 문을 열어주고 그랬는데 원목으로 일하면서 제 성격도 좀 부드러워졌어요. 약간 순화됐달까. 사실 군종병은 하면서 신앙이 진짜 더 돈독해지거나, 아니면 교회 기관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이 그렇듯 교회를 아예 등지게 되거나 두 가지 경우로 나뉘어요. 오히려 신앙을 잃어버리는 거죠. 그런데 저는 다행히 전자의 경우였던 것 같아요. 군 생활을 하면서 세상에 다양한 사람들이 있구나, 나는 편한 세상에서 살아왔구나! 그런 걸 느끼면서 성장하는 체험을 했던 것 같아요.
제대하고 교목실로 돌아와 보니 복사단을 새로운 친구들이 주도적으로 해나가는 상황인데 그때 저는 그게 그렇게 미덥지 않았어요. 내가 선배니까 너희보다 잘 안다는 그런 마음이 있었던 거죠. 그런데 어느 날 미사 끝날 무렵 교목실에 가보니 일이 났어요. 그때 교목실에서 활동하던 대학원생 선배 한 사람이 후배들이 노래를 못한다고 불만이 있었고, 자기 뜻대로 성가대를 통제하려다 보니 문제가 생긴 상황이더라고요. 제가 여러 사람에게 그 상황을 듣고 선배에게도 한 소리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돌아와서 보니까 그 선배의 모습이 꼭 내 모습이더라고요. 내 성에 안 찬다고 내 맘대로 하려고 했던 거죠. 사실 내가 안 해도 애들이 알아서 잘해요. 근데 그걸 인정을 못 했어요. 내가 없다고 교목실 안 굴러가는 게 아닌데, 그때는 내가 교목실에 반드시 있어야 하고, 내가 이끌어가야 하고 그런 게 있었던 거죠.
그때 정말 큰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래서 제일 먼저 이제 복사를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제가 나무랐던 친구들 목록을 작성해서 한 명 한 명 직접 찾아다니면서 사과했어요. 그게 저한테는 큰 계기였어요. 하느님께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내 모습을 보여줬던 것 같아요. 그따위로 살지 말아라, 저 모습이 바로 너의 모습이다. 그런데 사실은 ‘꼰대’라는 그 성품이 없어지진 않아요. 지금도 남아있어요. 그런데 이제는 저의 ‘꼰대력’을 제어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어요. 인정하면 되더라고요.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체로 대하고, 그 사람이 가진 능력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사람이 하다가 안 되어서 나에게 물어보면 그때 대답만 해주면 되는 거죠.
대학 졸업을 앞두고, 세진 씨는 자신 앞에는 정치를 하거나, 대학원에 가는 단 두 가지 길이 놓여있다고 생각했다. ‘정치하는 것’과 ‘정치를 공부하는 것’ 사이에서 세진 씨는 정치외교학 대학원 진학을 선택한다.
처음 대학원에 진학하고 느낀 건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였어요. 논문이나 책이나 봐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때는 통계를 이해하지 못해서 막 부딪히면서 배우는 시간이었어요.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는데,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이 신앙은 저에게 20대 내내 중요한 부분이었어요. 고학년이 될수록 학교에 가도 갈 곳이 없어지잖아요. 저는 일단 교목실에 가서 놀았던 것 같아요. 그게 저한테는 그냥 자연스러웠어요. 그냥 그렇게 됐어요. 물론 대학원은 집에서 너무 멀기도 하고, 대학원 생활 자체가 바빠서 교목실 활동을 길게 하지는 못했어요.
사실 대학원 시절에는 남들은 취업해서 직장 다니는데 나는 대학원생이고 앞길이 안보이니까 불안했어요. 박사 과정을 가고 싶다는 생각은 했는데 집안 눈치도 보이고,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014년에 대학원 진학해서 2016년에는 논문을 쓰게 됐어요. 이주민의 투표권이 대만의 지방선거에 미친 영향을 주제로 잡았는데 이주민의 숫자가 너무 적어서 영향을 못 미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하나 마나 한 연구가 된 거죠. 그런 식으로 2016년을 그냥 반백수인 상태로 지냈어요. 나는 대체 뭐 하는 놈이지, 아무것도 하는 게 없고 논문도 안 써지고 그런 상태로 있으니까 사람이 자신감도 없어지고 몸도 아프고 그렇더라고요. 학위를 2017년 8월에 받았으니까 꽤 시간이 걸렸죠. 그때가 서른쯤이었어요. 그때는 나는 대체 왜 사는 걸까 그런 고민을 했어요.
2017년부터 지금까지 세진 씨는 노동 문제를 연구하는 연구원으로 살고 있다. 지난 5년은 공교롭게도 최근 두 번의 정권 교체가 있었던 시기기도 하다. 특히 지난 정권에서 세진 씨가 연구하는 비정규 노동 문제는 여러 차례 시대적 화두가 됐다.
2017년 2월부터 3년간 비정규 노동 문제를 연구하는 센터의 연구원으로 근무했어요. 노동을 잘 모르는 상태로 공부하면서 일했는데 정권이 바뀌면서 노동 문제가 중요한 의제가 되고 저도 최저임금위원회나 일자리위원회 등에 참여하면서 정책 수립 과정과 현장 노동자들의 현실을 더 잘 알게 되었어요. 많이 배우는 기회였지만 한편으로는 버거운 면도 있었어요. 저는 대규모 투쟁 현장이 잘 안 맞았어요. 현장만 다녀오면 꼭 몸살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연구에 좀 더 중점을 두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제가 일했던 센터는 기본적으로 운동 단체예요. 연구도 하지만 활동이 중요하기 때문에 2019년쯤에는 번아웃이 오더라고요. 2018년 한해에만 연구를 18개를 하고, 현장도 같이 다니면서 나중에는 제가 글을 찍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떠나야 할 때가 왔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고정된 수익이 있으니까 이걸 놓는 게 쉽진 않았어요. 2019년 11월쯤에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리는 직장인 미사를 갔다가 고해성사를 보는데, 제 얘기를 듣던 신부님이 갑자기 심각해지셨어요. 그리고 저에게 정리할 때가 온 것 같다, 정리할 때는 뒤 돌아보지 말고 빨리하는 것이 좋다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때 큰 깨달음을 얻고 2020년 2월에 퇴사했어요. 당시에 공부를 더 해볼까 고민도 있었는데 마침 코로나19가 오면서 제약도 생기고 이제는 노동 문제 말고 좀 다른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 일하는 단체에 지원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노동 문제 연구자가 필요해서 저를 채용한 것이더라고요. 그래서 지금까지 쭉 노동 관련 연구하면서 살고 있어요.
문재인 정권 5년 동안 노동 문제를 다루면서 살았는데 마음이 좀 복잡하죠. 처음에는 이 정부가 많은 기대를 받으면서 시작했잖아요. 저는 실질적으로 개혁이 어떻게 좌절되어 갔는지 목격한 입장이니까요.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 전환 문제나 기간제 교사 정규직 전환 문제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지켜보면서 좀 충격을 받았어요. 물론 문제가 없진 않았어요. 하지만 뭐가 더 중요한지를 따져보면 분명해지는 부분인데, 이미 기득권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반감과 조직화 된 항의를 겪다 보니 2017년 여름에 이미 “아, 이 과정이 힘들겠다, 앞으로 쉽지 않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 저는 우리가 마지막이었구나, 우리 세대가 마지막이었구나! 느끼는 순간이 많아요. 저는 어렸을 때 그렇게 유복하게 자라지 않았지만, 동네 사람들이 저를 함께 돌보아주었고, 공동체 안에 있었거든요. 그런데 아이들이 이집 저집 오가면서 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 그런 세대는 우리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요. 또 저도 경쟁 사회 속에서 자랐고 지금도 살고 있지만 어느 정도는 같이 가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것 같지도 않아요. 최소한의 연대 의식 같은 것도 우리가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좀 슬프죠.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가 있다면 이번에 완전히 우리 사회가 박살이 나서, 밑바닥을 한번 보고 회복해나가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에요. 근데 이런 생각도 되게 슬픈 거죠.
그러나 1987년생인 세진 씨의 ‘우리 세대’는 2013년 발간된 오찬호 박사의 책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 ‘괴물이 된 이십 대의 자화상’으로 지칭되었던 바로 그 세대기도 하다. 2010년대 초반, 대학을 다닌 ‘우리 세대’는 이미 경쟁의 패자들을 죄책감 없이 차별하고 멸시하고 있었다. 세진 씨는 괴물이 되지 않게 자신을 다잡은 것은 ‘신앙’이었다고 말한다.
사실 신앙이라는 게 고리타분한 면이 있죠. 근데 그만큼 중심을 잡고 있다는 뜻도 되거든요.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니까 돌아볼 여유가 없잖아요. 저는 사람들이 좀 돌아볼 수 있다면 지금보다는 나아지겠다고 생각해요. 저한테는 신앙이 그 돌아보는 역할을 해준 것 같아요.
제가 만약에 교회에 대해서 어떤 거룩하고 성스러운 기준 같은 걸 가지고 있었으면 금방 떠났을 거예요. 저는 학교나 군대에서 교회가 어떤 곳인지 빨리 경험했고 빨리 받아들인 편이었어요. 교회에 깊게 들어가면서 떠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더 많이, 더 깊게 알았기 때문에 남을 수 있었어요. 저한테 신앙은 그냥 생활 같은 것 같아요. 그냥 같이 가는 거예요. 저는 특별히 기대하는 것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받아들이면서 계속 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밖에서 교회를 볼 때 특별히 환상을 갖고 여기는 뭔가 다를 것 같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거 빨리 깨져 버리잖아요. 이게 포기랑은 좀 달라요. 인정할 건 인정하고, 더 좋게 할 수 있는 건 같이 해보자는 거죠.
교회를 떠나고 싶은 이유가 많다는 것도 알지만, 저는 바로 그런 이유로 남았어요. 부족한 인간들의 공동체이지만 우리가 같이 갈 수 있는 공간이라고 믿는 거죠. 한때는 아 그냥 성공회로 개종할까 그런 생각도 했었는데 사실 거기도 똑같아요. 또 제가 교회를 떠나서 산다고 할 때 그게 과연 좋은 삶인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신앙 없는 삶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게 저한테는 내가 어떤 사람들처럼 돈 얘기 주식 얘기가 삶의 기준이 되고, 비정규직 노동자 무시하고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마음이랑 같이 가요. 저는 그런 삶을 살 용기가 없어요. 제가 딱히 약자들을 위해 정의롭게 무언가를 하고 그런 게 아니라, 신앙 없는 삶을 살면 벌을 받고 이런 개념이 아니라, 제가 생각하고 살아가는 토대에 신앙이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신앙이 없었다면 저는 정말 방탕하게 중심 없이 살았을 거예요.
세상에는 교회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런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우리가 교회를 어떻게 바꿔 나간다는 거는 어떻게 보면 좀 건방진 말이 될 것 같아요. 오히려 어떻게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함께 할 수 있을지 같이 봐야 할 것 같아요. 저 역시 저는 어떻게 해도 교회 안의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