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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을 위한 교회는 없다

2022년 겨울 기쁨과 희망 30호 기고
청년의 맥락
교회 안에도, 교회 밖에도, 청년에 관한 담론이 넘친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열고 들여다봐도 넘치는 이야기들 속에 정작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진짜 청년들의 목소리는 찾기 힘들다. 지난 대선의 키워드 가운데 하나였던 ‘MZ세대론’만 해도 그렇다. 1980년대생부터 2000년대 초반 출생자를 가리킨다는 이 세대 분류는 20대 초반에서 40대 중반까지 무려 스무 살이 넘는 나이 차의 사람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는다. 1982년생과 2002년생이, 마흔 살과 스무 살이 과연 한 세대에 속하는, 동질성을 공유하는 청년일 수 있는가 싶은 마땅한 의문 앞에, 이 세대 담론의 본질적인 한계가 드러난다.
담론이 집중하는 것은 청년세대를 구성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체적 인격이 아니다. 담론 안에서 청년들은 오히려 일정한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추상적 존재에 가깝다. 청년 담론은 새로운 프레임을 짜고, 더 많은 표를 얻고, 정권을 교체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그리고 더 많은 물건을 팔기 위해 욕망을 자극하고 소비를 촉진하는 경제적 목적으로 구성되고 확장된다. 비슷비슷한 뉴스를 재생산하며, 비판의 날을 세우기보다 정치와 경제의 이익에 손쉽게 복무하는 언론은 이에 기꺼이 편승한다. 이처럼 청년은 청년에 대한 담론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저 각자의 목적을 위해 이용되는 매개일 뿐이다.
이는 꼭 교회 밖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교회가 위기라는 새삼스럽지 않은 진단을 위해, 교회 안에서 청년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오래된 이야기는 반복된다. 교계 언론은 주기적으로 청년에 관한 기획과 특집을 연재하지만, 왠지 지면 속 이야기는 언제나 비슷한 느낌이다. 인터뷰나 특집을 주의 깊게 들여다볼수록, 청년에 관한 기획에 등장하는 청년들의 목소리에는 묘하게 기성세대의 교회가 원하는 메시지가 투영되어 있다는 의구심이 스며든다. 인터뷰 속의 청년들은 주로 성당 안에 또래가 많지 않아 활동하기 쉽지 않지만, 신앙생활 속에 위로와 치유를 체험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전히 신앙 안에서 기쁨을 느끼고 활발히 활동하는 청년들의 마음을 의심하거나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청년들이 사라져 가는 교회의 현실을 얘기하는 맥락에서도 왜 교회 언론은 교회를 떠나는 청년, 교회에 회의감을 표현하는 청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에 남아 기존의 교회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청년들을 인터뷰하는 것일까? 왠지 그것이 덜 불편한 목소리이기에, 그들이 바로 교회 언론의 운영 주체인 교구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청년들이기에 그렇지 않은가 싶은 삐딱한 마음마저 들어온다.
교회와 청년을 주제로 좌담회가 열리기도 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런 모임의 패널은 주로 청년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이들이다. 청년들을 동반하는 사제나 수도자로서, 청년 문제를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사목자나 학자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물론 있다. 그러나 청년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청년들에게는 발언권을 주지 않는 모습이 시사하는바 또한 있다. 이런 자리에서 주로 언급되는 청년세대의 특징은 개인주의적이며 책임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세대는 그 세대만의 경험과 상황이 존재하므로, 한 세대가 공유하는 보편적인 정서가 있을 것이고, 오늘날 젊은이들이 공유하는 정서가 개인주의적이며 책임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행사 역시 이미 기성세대가 바라보는 청년의 프레임에 맞춰 청년을 정의하고 있다는 뚜렷한 한계가 느껴진다. 청년에 관한 논의가 오래된 만큼이나 답이 없는 문제이기에 토론은 자주 청년들을 동반하는 노력이 중요하며, 청년들이 교회 안에서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다소 진부한 결론으로 끝맺는다.
그러나 여기서 교회가 논하는 공동체성, 교회가 추구하는 공동체의 모습이 오늘날 청년들의 삶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 그것이 과연 청년들이 원하는 공동체의 모습인지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2022년의 한국 천주교회가 말하는 공동체성의 회복에서 이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인가? 혹시 본당의 필요에 충실하고, 행사에도 기꺼이 동원되며, 어른들의 말에도 고분고분한 청년들의 모임을 여전히 바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닌가? 학교에서, 직장에서 이미 조직 생활에 지친 청년들에게 이런 방식의 공동체성은 회복하고 싶은 정신이 아니라 본당 활동을 피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될 뿐이다.
연결과 연결됨
물론 청년들 역시 연결되길 원한다. 관계 안에 속하길 원한다. 다만 연결됨의 의미와 그 방식이 다를 수 있음을 존중해야 한다. 이미 정해진 시각 안에서, 만들어진 틀 안에서 청년들을 바라볼 때 대화는 가능하지 않다. 자기의 경험과 삶의 자리 안에서 타인을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 모든 인간의 한계겠지만, 유독 청년에 대해서는 더 서슴없이 판단하는 사람들을 본다. 교회 안에서 이는 비단 교도권이나 제도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누구보다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이들도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젊은이들을 향해 날 선 비난을 아끼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본다.
교회 밖 정치의 논리와 언어가 너무나 그대로 교회 안으로 투영되는 상황도 세대 간 단절의 이유가 된다. 선과 악의 구분이 분명하고 뚜렷했던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해 온 세대의 경험을 존중하지만, 더 다양한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복잡한 상황에 관해서도 거침없이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즉결심판을 저어하지 않는 일부의 모습은 마음을 무겁게 하고 말문을 닫게 한다. 물론 선과 악의 대립은 언제나 존재하기에, 오늘날의 상황은 다만 악이 더 교묘해진 것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악을 식별하는 것이 어려워진 상황이라면 이에 맞서는 태도 또한 더 섬세하고, 더 치밀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곧 정의이고, 우리와 조금이라도 다른 입장과 접근은 정의롭지 않다는 자기 확신은 교회 밖에서나 안에서나 환멸감을 안겨다 주는 또 다른 요인이다. 결과만큼 과정도 정의로울 때, 그 과정에서 누구도 배제되지 않을 때, 적어도 이를 위해 노력하고자 할 때 비로소 함께 이뤄가는 결과 역시 정의롭고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충분히 서로를 존중하는 섬세함을 놓치고 마는 거친 과정을 통해 이루려는 결과로 자주 인권과 민주주의, 정의와 평화와 같은 가치가 언제나 언급되지만, 과정에서의 인권과 민주주의, 우리 안의 정의와 평화는 충분히 존중되고 있는 것일까? 청년들은 정말 사회의식이 부족해서,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이어서 정의를 위한 움직임에 동참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와 연대하지 않는 청년들이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이 역시 자신의 맥락에 청년을 가두는 것이 될 것이다.
더불어 세월호, 이태원 참사와 같은 사회적 트라우마 앞에, 교회의 목소리는 수많은 젊은이가 목숨을 잃은 비극 앞에서도 추한 일면을 감추지 않았던 교회 밖의 정파적 목소리와 얼마나 달랐는지 성찰도 필요하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말했지만,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비극적 사태 이후 예술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닌, 예술이 동시대 사회가 맞닥뜨린 비인간성에 대한 유일한 돌파구라는 것이었다. 사회적 참사와 이에 뒤따른 비인간적인 논쟁 앞에 종교는, 우리의 신앙은 과연 돌파구가 되었는가?
교회의 사회참여가 단지 세상의 논쟁에 휩쓸리는 데서 그친다면, 그 정당성과 가치는 교회 안에서도 밖에서도 존중받기 어렵다. 트라우마 이후 교회는 정치를 넘어선 신학, 정파를 떠난 성찰을 충분히 했는지 묻고 싶다. 청년들 역시 누구보다 치유와 화해, 정의와 평화를 갈망하고 희망한다. 그러나 때로는 태극기 부대에 의해 태극기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지워지는 것처럼, 너무 자주 반복되는 언어의 오용과 말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과정 안에 가치가 지닌 진짜 의미마저 오염되어 간다고 느낀다.
시노달리타스 여정에서
“교회는 젊은이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도 정작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으며, 함께한다고는 하는데 젊은이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노력들이 부족했다.”
지난 10월 13일 발표된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 한국 교회 종합 의견서에 등장한 청년에 관한 언급이다. 의견서는 교회가 청소년과 청년들에 대해서 온전한 동반자가 되지 못했음을 언급하며, 청년들이 교회로부터 멀어지기 이전에, 젊은이들의 삶에 무관심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 소홀했던 교회가 이미 청년들을 먼저 떠난 것은 아닌지 성찰한다. 의견서가 청년들이 교회로부터 멀어지는 원인으로 지적한 ‘과외수업, 진학, 취업 등에 쫓기는 세속화된 생활 환경 자체’가 과연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원인의 핵심인가에 관해서는 의문이 들지만, 그보다 먼저 청년들을 대하는 교회의 모습을 돌아보는 태도는 고무적이다.
시노달리타스 여정에서 젊은이들에 대한 언급이 중요하게 등장한 것은 비단 한국만은 아닌 것 같다. 10월 24일 바티칸의 주교대의원회 사무처에서 발표한 세계주교시노드 대륙별 단계 작업 문서에도 “교회의 삶에서 점점 더 젊은이들의 소리가 빈약하게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우려가 보편적으로 있었다(35항)”라며, 청년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더불어 앤틸리스 제도의 종합 의견서를 인용해 “우리의 젊은이들이 고도의 소외를 체험하기 때문에 우리는 젊은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교회는 젊은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할 수 있는가? 질문에 대한 답은 청년들이 바라는 교회가 어떤 모습인가를 성찰하는 데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의 초입에 언급한 교회 언론의 특집 기사나, 청년에 관해 열리는 좌담회의 결론에 동의하기 어려웠던 이유가 바로 청년들이 바라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에 관한 성찰이 부재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미 존재하는 기존의 문화와 틀 안에서 청년들에게 줄 수 있는 것, 베풀 수 있는 것을 고민한다면, 성찰도 그 성찰의 결과도 제한적일 것이다.
“사람들은 교회가 완전한 이들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상처받고 부서진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이기를 요구한다. 사람들은 교회가 어디에나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를, 그들을 판단하기보다는 함께 걷기를, 그리고 우월감이 아닌 돌봄과 진정성을 통하여 참된 관계를 수립하기를 원한다.” 역시 세계주교시노드 대륙별 단계 작업 문서 39항에 인용된 미국주교회의 종합 의견서의 내용이다. 청년들을 특정한 맥락은 아니지만, 청년들이 바라는 교회의 모습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교리 교육의 부재, 공동체 활동이나 피정 등 영적 생활을 체험할 기회의 부족 등을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로 바라본다면 이는 문제의 너무나 작은 조각만을 붙들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진짜 문제는 더 크고 깊다. 청년들의 공동체성 부족을 지적하기 전에 우리의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인가, 그리고 교회는 어떤 공동체를 꿈꾸고 있는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더불어 시노달리타스에 관한 시노드인 이번 주교시노드를 의사 결정 권한의 분배 과정으로만 이해하는 시각의 문제도 짚고 싶다. 권위의 해체, 권력의 분산은 시노드의 핵심이 아닐 것이다. 종종 시노달리타스가 곧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는 데서 여전한 권력 구조에 관한 관심과 민감함을 읽는다. 건강하지 않은 모습으로 작동하는 성직주의가 만연한 현실에서 이는 당연한 결과이겠으나, 시노달리타스를 그저 권력의 재분배, 교회의 새로운 의사 결정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하느님 백성 전체가 성령의 이끄심 안에 함께 걷는 길이라는 진정한 의미를 흐리게 된다고 믿는다.
“포용, 대화, 투명성, 식별, 모든 이에 대한 인정과 공동 책임성의 제도적 장”이 이번 주교시노드의 핵심 키워드로 제시된 것은 특히 고무적이며, 이는 청년을 위한 교회를 성찰하는 과정에도 영감이 될 것이라 믿는다.
청년을 위한 교회는 없다. 그러나 사실 이혼하고 재혼한 이들, 한 부모 가정, 성 소수자, 장애인, 낙태한 여성을 위한 교회 역시 없다. 청년이 원하는 교회 역시 청년이, 평신도가, 여성이 주도권을 쥐는 교회가 아니다. 오히려 누구도 무시하고 배제하지 않는, 모두의 목소리가 환대받는 교회가 비로소 청년을 위한, 평신도를 위한, 여성을 위한 함께 걷는 교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