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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문 앞에서, 교회 안 여성의 자리

2021년 봄호 가톨릭평론 기고
주목할 만한 흐름
몇 가지 주목할 만한 흐름이 있다. 먼저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1월 11일 자의교서 ‘주님의 성령’(Spiritus Domini)을 발표하고 근래의 ‘교의적 발전’을 인정해 교회법을 바꾼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독서직과 시종직에 공식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범주는 ‘평신도 남성’에서 ‘평신도’로 바뀌었다. 여성도 독서자와 복사, 성찬 봉사자가 될 수 있도록 명시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많은 이들이 이번 자의교서를 통해 그간 여성들이 수행해온 독서와 복사 직무가 엄밀히 말하면 공식적으로 여성들에게 허용된 직무가 아니며, 교회법적으로 임시조치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편 2월 6일 프랑스 하비에르선교수녀회 나탈리 베카르 수녀가 세계주교시노드 사무국장에 임명되었다. 사무국장은 시노드 사무총장 마리오 그레치 추기경을 보좌해 시노드를 조직하고 당연직 대의원으로 시노드에 참석한다. 이로써 베카르 수녀는 주교 시노드 투표권을 가진 첫 여성이 되었다. 그간 주교시노드에 참관인 또는 전문가로 참석한 여성들은 있었으나 대의원으로 투표권을 행사하는 사례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베카르 수녀 또한 2018년에는 청년 시노드의 옵서버로 참석했고, 2019년 아마존 시노드에서는 자문위원으로 일했다.
2020년 2월 아마존 시노드 후속 교황 권고로 발표된 ‘사랑하는 아마존(Querida Amazon)’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놀라운 헌신과 깊은 믿음을 통해 여성이 교회를 살아있게 했다”라며, 우리가 마주한 역사적 순간에 구체적 필요에 부응하는 여성의 다양한 직무와 은사가 생겨나도록 장려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같은 해 8월 교황은 교황청 경제를 책임지는 재무평의회에 6명의 여성 전문가를 발탁했다. 바티칸 박물관장, 평신도가정생명부 차관 등 바티칸의 다양한 업무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는 여성 평신도들의 비중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더 많은 여성이 교회 안의 식별과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의지는 분명해 보인다. 자의교서 ‘주님의 성령’ 반포 역시 교회의 모든 차원에서 여성에게 더 많은 자리를 주려는 교황의 소망을 보여준다. 다가오는 주교시노드의 사무총장 마리오 그레치 추기경은 나탈리 베카르 수녀의 사무국장 임명에 관한 코멘트에서 “베카르 수녀가 투표권을 갖고 시노드에 참석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문은 열렸다”며 “장차 다른 조치들이 취해질 것인지 지켜보자”고 말했다.
문은 열렸다
그레치 추기경의 말처럼 ‘문’은 열렸다. 교회 내 여성의 참여가 확대되어야 한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의지는 고무적이다. 여성 평신도의 안정적이고 제도적인 전례 참여를 위한 교회법 개정과 시노드에서 투표권을 행사하는 첫 여성의 탄생, 바티칸의 주요 직책에 더 많은 여성이 참여하는 과정은 의미 깊은 진전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어렵게 열린 문은 여전히 좁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련의 흐름에 부풀어오는 마음만큼이나 한편으로는 2021년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모든 영역에서 여성의 폭넓은 참여가 당연하고 마땅하게 여겨지는 일상과 비교할 때 교회 안에서 여성의 참여는 얼마나 낯설고, 비일상적인지 성찰하게 된다. 베카르 수녀의 발탁은 고무적인 일이지만, 이는 곧 그를 제외한 수백 명의 다른 대의원은 모두 남성임을 의미한다. 더불어 지금까지 시노드의 의사결정 권한을 지닌 모든 참가자는 남성이었음을 상기한다. 의회에서 법정, 기업, 병원, 군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조직의 의사결정 구조를 고려해보아도 이처럼 여성의 참여가 제한적인 공간은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자의교서 ‘주님의 성령’에 관해 여성 부제 제도 연구자이자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6년 소집한 여성부제연구위원회 위원을 지낸 호프스트라 대학의 필리스 자가노 교수는 여성이 전례 중에 제대 근처에서 봉사할 수 있다는 “첫 공식 인정”이라고 설명한다. 자가노 교수는 더 나아가 이번 조치를 “여성도 성스러운 제단에 설 수 있으며, 여성이 신성함 근처에 존재할 수 있음을 교황님이 법으로 규정한 것”이라고 해설한다. 이번 교서에서 “여성도 같은 인간”이라는 메시지까지 짚어내는 자가노 교수가 지나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성 또한 성스러운 전례에서 마땅한 직무에 봉사할 자격이 있음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이미 한국 교회를 비롯한 전 세계 지역 교회에서는 지역 주교들의 승인 아래 관행적으로 여성 평신도들이 독서와 복사 등으로 전례 봉사자로 참여해왔다. 기존 교회법 230조 2항과 3항이 임시적 위임일 경우 모든 평신도, 즉 여성 평신도에게도 독서직과 시종직을 위임할 수 있다고 규정한 데 따른 것이다. 많은 지역 교회들은 사제 부족과 남성 봉사자 부족 등의 사목적 현실을 고려해 여성 평신도가 독서를 하거나, 제대 봉사를 하도록 해왔다. 그러나 이런 제한적 규정 위에서 여성의 전례 참여는 여성 또한 세례받은 교회의 지체로서 마땅히 전례에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부족한 남성 신자의 몫을 대신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힘들다.
교회 안에서 기쁨과 헌신으로 일하고 봉사하면서도 여성들은 너무 자주 성소의 부족 때문에 여성 지도자를 양성해야 하며, 남성 신자들이 교회에서 줄어들고 있기에 여성 신자에게 더 많은 권한을 주어야 하며, 남학생들이 복사로 봉사하는 것을 점점 기피하기에 여학생들이 복사로 더 자주 서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과 마주한다. 이런 논리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여성들의 실질적인 참여를 증진하는 효과도 있지만, 남성이 부족하기에 여성으로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인식의 한계는 분명하다. 이러한 인식의 이면에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여성의 참여를 당연하게 여기거나 여성의 참여가 전례와 논의를 더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제 사람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내어준다는 인상이 강하게 배어 있다.
엄마와 딸의 자리
변화는 점진적이지만 분명하게 일어나고 있다. 상대적으로 성소의 부족이 심각하고 사회적으로 여성의 참여가 활발한 유럽과 북미, 호주 등지에서 교회 기관과 조직, 가톨릭 대학의 리더십이 여성 평신도인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런 흐름이 아직 우리 교회에까지 유의미한 영향을 주고 있지는 못한다고 느낀다.
교회 안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로서 참석하는 여러 회의나 행사에서, 그 모임이 중요하고 엄숙하다고 여겨질수록 젊은 여성인 나에게는 발언권이 없다고 느낀다. 물론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공간에 여성 평신도가 참석하는 것 자체가 진전이라면 진전이다. 유독 교회 기관에서 주최하는 심포지엄이나 컨퍼런스에서는 여성 발제자와 토론자의 비율이 낮고, 비중 또한 적다고 느낀다. 이 역시 사제만이 아닌 여성 평신도의 목소리도 듣는다는 노력 자체에 의미를 둘 수는 있겠다. 그러나 교회 안팎의 단체와 연대하며 일하는 업무의 특성상 교회 안과 밖의 온도 차는 뚜렷하게 느껴진다.
본당에서의 현실은 좀 더 적나라하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 가족이 다닌 본당은 30년 동안 크게 바뀐 것이 없다. 봉사자의 대부분이 여성이어도 여전히 총회장은 남성인 것이 자연스럽다. 여학생들이 복사를 서는 것은 내가 고향을 떠날 무렵에는 자연스러워졌지만, 그것도 초등학교 때까지만이다. 사람들이 미사에 참례하는 동안 평생 헌신적으로 봉사해온 이제는 연로한 자매님들이 국수를 삶고 식혜를 준비한다. 어린이 미사가 있는 토요일 오후와 교중 미사가 있는 주일 오전을 오롯이 성당 주방에서 보내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 딸에게 교회에서 여성의 자리를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자리는 다름 아닌 ‘주방’이었다.
교계 언론에서 취재기자로 일했고, 수도회 소속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딸의 자리는 좀 더 나은 것일까? 기자로 일하며 가장 고역스러운 일이 미사를 취재하는 일이었다. 신자들이 조용히 미사를 드리는 동안 홀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일은 참 괴로웠다. 복음을 전하고, 지금 여기 교회의 모습을 기록한다는 사명감으로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불행하게도 많은 사제들이 미사 중에 큰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진을 얻어 보겠다고 제대 근처를 얼쩡거리다가 호된 야단을 맞고 성당에 출입 금지를 당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져 나는 사진 찍는 나를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생각만 들어도 주눅이 들었다.
예수회로 직장을 옮기고, 지난해 여름에는 처음으로 사제서품식에 참석했다. 서품식을 기록하는 역할을 맡아 노트북과 카메라를 켜고 명동대성당 2층 가장 뒤쪽에 앉아 서품식을 지켜보았다. 사제서품식은 참 아름다웠다. 오랜 식별과 수련, 기도와 연학 끝에 주님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수사님들의 모습을 벅찬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신부님들은 새롭게 탄생한 사제들을 안수하며 축복했다. 예식은 길었지만 모든 순간이 고결하고 성스럽게 느껴져 눈을 떼기 힘들었다. 귀한 자리에 함께하며 새 사제를 위해 기도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한편 들어온 생각은 아름답고 성스러운 순간에 속하지 못한 채 이를 지켜보는 관객이 된 것만 같은 이질감이었다.
지난 30년간 주일미사에 참례하면서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다. 전례가 아름다울수록, 성스러운 순간이 주는 감동이 클수록 나는 이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의 일부가 아닌 관객이라는 씁쓸한 감상이 배가되었다. 이후 서품식에 대한 마음을 나누었을 때 친구가 알려준 단어는 서품식을 내려 본 나의 자리가 일종의 ‘밴티지 포인트(vantage point: 무언가를 지켜보기에 좋은 위치 또는 시점과 상황)’였다는 것이다. 그날 나의 자리는 그동안 보지 못한 것이 새롭게 보이는 자리였다.
닫힌 문과 다른 문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6년과 2020년 두 차례에 걸쳐 여성의 부제 서품 가능성을 검토하는 여성부제연구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여성의 성직에 관한 교황청의 입장은 여전히 매우 신중하다. 여성부제연구위원회는 아직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고, 교황은 여러 차례에 걸쳐 “여성은 성품성사의 품계를 요구하지 않는 교회 직무나 역할에 받아들여져 여성 고유의 위상을 더욱 잘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여성 성직에 관한 입장은 일면 “교회는 여성에게 사제 서품을 허용할 권한이 스스로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교황 바오로 6세의 선언이나 요한 바오로 2세의 확인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특히 ‘남성에게만 유보된 사제 서품에 관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는 여성 사제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논의 자체를 닫았다고 논해진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닫힌 문을 열기보다는 사제 서품이 필요하지 않은 직무에 여성들이 참여하는 기회의 문을 하나씩 열어가는 중이다.
“사제의 직무는 다른 직무들보다 우월하지 않고, 온전히 그리스도의 지체들의 거룩함에 예속된다”는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에 공감한다. “여성이 성품에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교회 안에서 여성에게 더 큰 위상과 참여가 허용될 것이라는 생각과 접근은 오히려 우리의 시각을 더욱 좁혀버린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지적에도 공감한다. 교회 안 여성의 자리를 살필수록 문제는 여성 사제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기 때문이다. 더불어 여성 전문가들이 바티칸과 주요 교회 조직의 리더십이 되는 것이 그레치 추기경의 말을 다시 인용하자면 “문을 여는 것”이 되겠지만, 결코 끝은 아닐 것이다.
역시 2016년 구성된 여성부제연구위원회의 위원이자 교황청립 안토니아눔 대학 학장 마리 멜로네 수녀는 여성 부제직에 관한 인터뷰에서 “교회 안의 의사결정에 여성이 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는 여성이 교회 안의 권력 공간을 점유한다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의 참여와 권한으로 교회를 성장하게 돕는다는 의식”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멜로네 수녀는 “사제 서품이 여성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보장하는 유일한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도 동시에 사제직이 여성을 의사결정에서 배제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여성 성직에 관한 민감한 논의에 앞서며 더 시급한 것은 교회 안의 직무를 권력과 배제의 구조로 해석하고 집행하는 오래되고 지독한 관행들을 개선하는 것이다. 여성들이 가진 고유한 힘과 재능으로 교회의 지체로서 봉사하기 위해 반드시 사제가 될 필요는 없다는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너무 자주 사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성사 집행과는 무관한 직무에조차 배제되는 것이 오랜 현실이라면, 사제의 직무를 교회 안의 다른 직무보다 더 우월하고 거룩한 것으로 믿고 행하는 관습이 바뀔 기미조차 없다면 세례받은 교회의 지체로서 각자의 직무를 복되게 수행한다는 아름다운 이상은 손쉽게 차별과 배제를 포장하는 말이 되어버릴 위험이 있다.
우리는 더 아름다울 수 있다
“하느님 백성 전체는 본디 그 공동합의적 소명으로 부름을 받는다. 모든 신자가 지니고 있는 신앙 감각, 공동합의성을 실현하는 여러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식별, 그리고 일치와 다스림의 사목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의 권위 사이의 순환적 관계가 공동합의성의 역동성을 나타낸다.”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 제72항)
결국 공동합의성의 정신이 교회 안 여성의 자리를 성찰하며 넓혀가는 길에도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교회를 이루는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안에서 존엄한 존재이며 동등하기에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는 함께 공동체를 이뤄 누구도 소외하지 않고 배제되지 않도록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협력해나갈 의무가 있다.
교회와 여성의 문제를 얘기할 때 유독 긴장이 흐르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반대로 공동합의성의 정신에 있어 오히려 교회는 너무나 긴장이 부족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느님 백성으로 부름받은 각자의 직무가 결코 지상의 권력이 아님을 인식하고 행할 때, 공동체 안의 어떤 소외나 배제가 없도록 서로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의식하며 서로를 돌볼 때 우리는, 우리 교회는, 우리의 공동체는 더 아름다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