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학교와 신앙, 표현은 달라도 같은 곳을 향한 두 갈래 사랑의 길
2020년 2월 인터뷰
김숙자(안나) 선생님은 재일조선인이다. 선생님은 조선학교에서 민족교육을 받고, 조선학교 교원과 조선신보사 기자를 지낸 동포이자 구교우 집안에서 자란 신앙인이다. 김숙자 선생님은 조선학교를 나온 가톨릭 신자는 자신 외에는 누구도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가톨릭 신앙과 조선학교는 그만큼 재일동포 사회 안에서도 이질적인 두 개의 정체성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에 존재했던 두 갈래의 길은 모두 자신을 더욱 풍부한 사랑으로 이끄는 길이었다고 말한다. 2020년 2월 17일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가진 김숙자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이 자리에 소개한다.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재일조선인 3세입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일본에서 태어났던 2세였고 어머니는 우리말을 하셨지만, 아버지는 우리말을 감각으로만 알고 거의 못 하셨습니다. 중학교까지는 일본학교에 다녔고, 고등학교부터 조선학교에 다니기 시작해 도쿄에 있는 조선대학교까지 진학했습니다. 조선대학교 졸업 후에는 조선학교 교원을 8년간, 그 후에는 조선신보사(재일동포들이 발간하는 신문) 기자를 다시 8년간 지냈습니다. 그 후에는 서울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으로 석사 과정을 한 후 직장을 다니면서 남편과 ‘우리학교 풍경’이라는 잡지를 격월로 발간했습니다. 지난해 시월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잡지 발간은 중단되었습니다.
중학교까지는 일본학교를 다녔는데 고등학교부터 조선학교로 진학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 집은 대대로 이어온 천주교 집안이었습니다. 자연히 조총련이나 조선학교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학생 운동을 하면서 아이들을 조선학교에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열두 형제의 맏이로 대가족이 우리 집에 모두 함께 사는 형편에서 아이들을 조선학교에 보내려 해도 번번이 반대가 압도적이어서 어렵게 되곤 했습니다. 그러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삼촌들도 결혼하며 집을 떠나면서 우리 형제들이 하나둘 진학할 때마다 본격적인 실랑이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매번 조선학교로 보내고 싶어 했지만, 조선학교를 ‘악마의 학교’, ‘빨갱이 학교’로 부르며 반대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있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당시 다니던 일본학교 담임선생님의 장인이 재일조선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물론 일본 분이었지만 자기 부인을 보며 오히려 저에게 “재일조선인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길도 있다. 너는 다른 길을 걸으면 어떻겠냐?”고 설득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선생님이 뜻이 맞아 저를 설득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저는 일본학교에서도 학교생활을 아주 즐겁게 했던 편입니다. 학급 반장도 했고, 친구들도 많았고, 선후배들과도 사이가 아주 좋았습니다. 하지만 일본학교에 다니는 재일조선인이라면 누구나 ‘나는 무슨 벌을 받아서 왜 조선 사람으로 태어났을까?’ 생각해보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생활이 즐거운데도 마음 한편에는 무거운 돌을 안고 사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선생님의 설득을 받으며 ‘이 무거운 감정을 조선학교라는 곳에서 해소할 수 있다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마침내 조선학교에 가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당시 일본 친구들은 무척 반대했어요. 그렇게 폭력적인 학교에는 절대 안 된다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당시가 바로 영화 ‘박치기’의 시대였고, 저는 영화의 배경인 교토 출신이었거든요. 일본 친구들은 이후에도 종종 집에 찾아와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묻고 가고, 저를 조선학교에 보내고자 하셨던 중학교 담임선생님은 시험 기간마다 집을 찾아와서 지도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말도 잘 모르는데 수업을 따라갈 수 있겠냐”하면서요. 돌아보면 정말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이후에 저도 조선대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모교인 교토 조선학교로 돌아와 교원으로 일했습니다.
조선학교와 일본학교를 모두 경험해 본 셈입니다. 일본학교를 떠나 입학한 조선학교는 어떤 학교였습니까?
설비가 엉망이었고 영화 ‘박치기’에 나오는 것처럼 학생들은 모범생이 아니었습니다. 학교 시스템은 역시 일본학교 쪽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조선학교가 좋았던 것은 또래의 조선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학교에 오기 전까지는 젊은 조선인을 본 일이 없었습니다. 주로 보는 조선 사람은 대체로 1세대로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우리 세대와는 문화가 달라 공통점을 찾기가 어려웠는데 학교에는 같은 세대의 조선 사람이 있다는 것이 가장 달랐습니다. 같은 문화를 가진 친구들과 같이 있다는 것, 이 사람들과 같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든든하고, 안심됐습니다. 당시는 조총련 전체에 여러 어려움이 있던 시기여서 문제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저는 조선학교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았습니다. 그때 저는 하느님께 “하느님은 저를 도와주시지 않았지만, 조선학교가 저를 구원해주었습니다”라고 고백하곤 했습니다. 저에게는 조선학교가 해방이었던 것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천주교 신앙과 조선학교 진학이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동포 사회에서도 드문 존재셨는데 어떻게 신앙인으로서 또 재일조선인으로서 두 가지 정체성을 통합해 나가셨습니까?
우리 집은 대대로 천주교 집안이었고 저도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매일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묵주기도를 바치는 독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어린 나를 깨워 꼭 성당에 데려가고, 아무리 졸려도 기도를 해야만 잠자리에 드는 깊은 신앙심이 깃든 가정이었습니다. 주일학교가 너무 재미있어서 학교 친구들도 데려가고, 중학생 때는 견진성사도 받으며 정말 열심히 성당에 다녔습니다.
당시 교토에는 ‘코리안 가톨릭센터’라고 해서 재일조선인들을 위한 성당이 있었습니다. 다른 지방은 일본 신자들이 다니는 본당을 빌려 우리말 미사를 드리는 정도였는데 교토에는 재일조선인 가톨릭 커뮤니티를 위한 공간이 독립적으로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시카고에서 오신 메리놀 선교회 카로 신부님께서 재일조선인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해 그런 공간을 마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신앙 안에 동포들의 귀속의식은 아주 강했고 우리 부모님도 그곳에서 만나 결혼하셨습니다. 어릴 때는 교구 성당을 다니면서 한 달에 한번쯤은 센터를 가곤 했습니다.
당시 천주교인 동포들에게 조선학교나 조총련은 완전히 다른 존재, 말하자면 적대세력이었습니다. ‘빨갱이’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말조차 꺼내고 싶지 않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조선학교로 진학하는 것은 신앙을 버리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적대 관계였습니다. 제가 조선학교에 간다는 것은 정말 큰 파문이었습니다. 수녀님이었던 고모는 우리 집을 찾아와 땅을 치고 가기도 했습니다. 삼촌들도 다 신학교를 다녔던 적이 있던 분들이었고 신앙을 떠난 사람에게 아주 엄격한 분위기였습니다. 친척들 사이에서 저는 다른 세계로 간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자연히 저도 성당을 다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당을 안 나간다고 해서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 항상 기도하고 하느님과 대화하며 신앙 안에 머물렀습니다. 성당에 가지 않지만, 삶에서 신앙을 없앨 수는 없는 채로 지내왔습니다. 제가 조선대를 다니고, 조선신보사 기자를 하던 시절에도 사제였던 삼촌은 성서를 보내오기도 하며 저를 생각해 주었습니다. 그러다 교토에서 조선학교 교원을 하던 때 아버지가 쓰러지셨습니다.
故 김수환 추기경님은 우리 할머니의 사촌 되셨는데 예전부터 친척들과 가까이 지내던 인연으로 아버지를 문병 오셨습니다. 그때 처음 만난 추기경님께서는 우리말을 할 수 있고 우리 역사를 알고 있던 저를 무척 반가워하셨습니다.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추기경님이 선종하시기까지 편지를 주고받고, 일본에 오시면 함께 여행을 가기도 하고, 해외 순방에도 동행하기도 하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추기경님과 함께 여행한다는 것은 곧 성당을 돈다는 뜻입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한국어로 기도를 배우고 다시 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성당에서 멀어지고 떨어지려는 순간마다 나를 끌어 안아주는 손길이 있구나!’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조선신보사를 그만두고 결혼하게 된 후에는 역시 재일동포였던 남편이 자신도 세례 성사를 받겠다고 나섰습니다. 저는 ‘추기경님도 우리 집에 오시고 하니 괜히 그런 소릴 하는가’ 싶어 절대 그러지 말라고 반대했습니다. “안 믿는 사람이 믿는다고 하는 게 나는 제일 무서워” 이렇게 말하면서요. 그런데 남편이 저 몰래 예비자교리를 받고 결국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까지도 저는 주일미사를 꼬박꼬박 드리지 않았는데 남편이 이제는 같이 매 주일 성당에 가자고 말했습니다.
또 제가 어느 날은 하느님께 이런저런 것을 청하는 기도를 했더니 남편이 놀라며 성당은 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사하기 위해 가는 것이라고 말해 놀란 적도 있습니다. 지난해 남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당신 신자가 되어 좋았어?” 물었더니 남편이 “나는 내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확신할 수가 없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때 ‘이 사람이 진짜 신자가 되었구나’ 느꼈습니다. 하느님이 진짜인지 묻고, 의심하고, 흔들리는 것이 있어야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편이 선종하게 되고 그가 세례를 받았던 성당을 찾아 장례미사를 준비했습니다. 남편과 나는 조선학교에 대한 잡지를 만들며 조총련 사회 속에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장례식을 성당에서 하면 작별 인사를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당황할 것이 걱정되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신부님께 말씀을 드리니 동포들과 장례를 치르고 후에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해도 괜찮다며 너무 어렵게 생각 말고 남편을 편하게 보내드리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얘기를 듣자 마음이 가벼워지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덕분에 재일동포들이 하는 식으로 먼저 장례를 치르고 그 후 가족들과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드렸습니다.
재일조선인은 일본 사회의 소수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드문 일본에서 천주교 신자도 소수자입니다. 재일조선인으로서 천주교인이라는 것은 소수자 가운데서도 소수자였던 것입니다. 소수자면서 다시 소수자인 삶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남편이 병을 얻은 후에 신부가 된 삼촌과 메일을 주고받으며 삼촌에게 “제 인생에서 정말 다행이었던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신앙이 있는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것, 다른 하나는 조선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돌아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신앙이 있는 가정에서 자랐기에 사랑이나 인생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많았고, 조선학교를 다녔기에 자신의 뿌리에 대해 알며 인생의 기둥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물론 조선학교나 조총련 사회에 신자들이 없기에 제가 소수였던 것은 맞지만 저에게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조선인이라서 차별당하거나 배제당하는 일은 있어도 동포들 안에서 제가 천주교 신자여서 배제당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지난해 예수회가 조선학교를 지원하는 프로젝트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천지개벽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시민단체 ‘몽당연필’에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이 회원으로 계시고, 신자 분들도 많이 있다는 것에 감동했습니다. 그러다 예수회가 이렇게 직접 움직인다는 것에 무척 놀랐습니다. 조선학교는 재일조선인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보는 공간입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아들딸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라고 배웁니다. 이것은 ‘표현은 달라도 결국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만드는 일과 조선학교를 위하는 일이 제 삶 안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축복이었습니다. 소수자로서의 삶은 제게는 사랑이었습니다. 조선학교와 가톨릭 신앙은 모두 제 삶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 길이었습니다.
지난 몇 년 사이 그동안 재일동포들을 외면해온 한국에서도 동포들과의 교류와 연대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재일조선인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조선학교는 북한의 지원 덕분에 이제까지 버텨온 학교입니다. 해방 직후에 국어 강습소로 시작한 조선학교를 일본 정부는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 항상 탄압해왔습니다. 1948년에는 실제로 학교 폐쇄령을 내고 경찰력을 동원해 학교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각지에서 동포들의 항의 투쟁이 벌어졌고 오사카에서는 14살 소년이 경찰의 총에 맞아 죽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당시 격렬한 투쟁을 통해서 겨우 몇 개의 조선학교가 일본학교의 분교 형식으로 민족교육의 등불을 이을 수 있었습니다.
이를 자주 학교로 재정비하고 전국적인 민족교육체계를 구축한 것이 1955년 창립된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였고, 이를 지원한 것이 북한이었습니다. 북한은 1957년부터 작년 4월(2억 1880만 엔)까지 165번에 걸쳐 총 484억 4373만 엔에 이르는 교육원조비를 보내왔습니다. 북한은 일본 각지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을 해마다 수학여행으로 받아주고, 뛰어난 재능이 있는 학생들은 국가대표로 국제무대에 세우는 등 다방면으로 재일조선인들을 배려하고 내세워줬습니다. 우리 재일조선인들이 의지하는 곳은 언제나 북한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학교에서는 ‘우리 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가르치며 학생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본 사회에서 조선학교는 항상 차별과 탄압을 받아왔습니다. 등굣길에서 조선학교 학생이라고 폭언을 퍼붓거나 여학생들이 교복으로 입는 치마저고리를 칼로 찢어버리는 사건이 한두 건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일본 당국은 유치원이나 고등학교의 무상화 제도에 다른 외국인학교는 다 포함하면서도 오직 조선학교만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지난 정권까지는 한국 정부도 한국 국적 학생이 북한으로 수학여행을 가지 못 하도록 공지문을 내는 등 노골적으로 조선학교를 탄압해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와 학생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긴장을 풀 수 없고 민감해야 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조선학교와 함께 하는 ‘몽당연필’ 스태프들은 그런 민감하고 경각성이 높은 조선학교를 지원하기 위해 20년 가까이 노력해온 사람들입니다. 그런 단체를 통해서 조선학교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통일에 대박이 없듯이 한국 분들과 재일조선인도 만났다고 바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에게 관심을 갖는 데서 시작해서 서로가 참을성을 갖고 한 걸음씩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처음은 그렇게 마음으로 다가와 주시고 조선학교를 지원해주셨으면 합니다.
한국에서 우리를 지원해주시는 분들은 조선학교를 알면서 행복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들을 접하면서 여러모로 감동해 “왜 이렇게 선한 분들이 많으세요?”라고 물었더니 “아니요, 조선학교를 알게 되면 선하게 되어요”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된다고 할 수도 없고, 그것뿐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서로 만나고 이해하려 하면서 사람은 시야가 넓어지고 기쁘고 행복해진다고 믿습니다.
아직은 여전히 분단 상황입니다. 한순간에 하나 되기는 어렵습니다. 분단을 경험하는 우리가 조선학교를 이해하는 과정은 곧 분단을 극복해가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제 식민통치와 분단의 역사가 들씌운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을 서로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으로 치유해간다면 우리는 그 따뜻함으로 아이들을 위해 더 밝은 내일을 열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오시도록 하는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